# 미래는 이미 와있다
미래는 이미 와있다. 모두에게 똑같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은 이제 혼자 산다. 인간은 오래 살게 됐다. 그리고 인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여하는 정도가 점점 줄어든다. 이 상수들은 코로나19가 아니라 이전부터 관찰돼왔으나 이제 그 변화들이 우리에게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
변화는 쉼 없는 것이고, 새로운 건 늘 존재한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가 아닌가, 민감해지는 것의 문제이다. 그 차이에 민감해지면 '다음'이 보인다.
데이터를 통해 알게된 것은 성장은 목표가 아니라 매일을 잘 살면 얻는 훈장 같은 것이라는 거다.
일의 자동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남는 건 우리의 정성을 담을 수 있는 부분이다. 숙련을 넘어 진정성을 담을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일에 진정성을 담기위해 주체성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 이야기 속에 살아라
자택에 책이 약 2만 권이나 있어, 7대의 컴퓨터를 사용해 자료를 찾는다. 봐야 할 데이터가 겹치는 것이 싫어 컴퓨터를 여러 대 놓고 작업했다.
이야기 속에서 사는 것이 럭셔리하게 사는 것이다. 주변에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느냐 하는 것이 럭셔리한 삶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꿈과 환상의 세계인데 이게 생활이라면 얼마나 럭셔리한것인가.
195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내 이름을 직접 써서 준 책이 있다. 백남준은 크레파스로 입 모양을 그리고 그 밑에 ‘한국의 말’이라고 적은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런 책과 그림은 값진 이야기가 있으므로 럭셔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고급 차를 탄다고 한들 빨리 이동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럭셔리는 사라진다. 빈티지 자동차라도 여유 있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이 훨씬 고급스러운 것이다.
새벽 5시 정도면 일어나 글을 쓴다. 저녁 약속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선 잡지 않는다. 계속해서 책을 내고 글을 쓰는 것은 이 작업을 할 때 행복하기 때문이다. 3분의 1 정도는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쓰고, 또 3분의 1은 어쩔 수 없는 의무감에서 쓰고, 나머지 3분의 1만 기침처럼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글쓰기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쓰는 것이지만 괜찮다. 동이 섞이지 않는 ‘순금의 생애’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타인 지향적인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럭셔리한 삶도 멀어진다.
# COP26에 맞춰 다시 읽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
아득히 먼 곳에서 지구는 어떤 특별한 존재로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만은 다르다. 이 점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그게 여기이다. 그게 고향이다. 그게 우리이다. 그 위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 우리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갔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의 집합, 수천 종류에 이르는 종교, 사상, 경제 정책, 모든 사냥꾼과 채집가, 모든 영웅과 겁쟁이, 모든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모든 왕과 농민, 사랑에 빠진 모든 젊은 연인,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와 희망에 찬 아이, 모든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윤리적 지도자, 모든 부패한 정치인,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의 지도자”, 모든 성인과 죄인이 우리 종의 역사를 통틀어 이곳, 태양 광선에 매달린 먼지 한 톨 위에서 살아갔다. 광대한 우주의 투기장에서 지구는 아주 작디작은 무대이다. 모든 장군과 황제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생각해보라. 그 영광과 승리를 통해 그들은 이 점에서도 아주 작디작은 부분의 그것도 일시적인 주인이 되었을 뿐이다. 이 티끌 위 한구석의 거주민이 거의 차이를 분간할 수도 없는 다른 한구석의 거주민에게 저지른 끝도 없는 잔인한 짓들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서로를 오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 우리의 증오가 얼마나 뜨겁게 불타오르는지 생각해보라. 우리의 오만함, 우리가 중요한 존재라는 착각, 우주에서 우리가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은 이 창백하게 빛나는 점의 도전을 받는다. 우리 행성은 거대한 우주의 어둠으로 뒤덮인 한복판에 떠오른 외로운 티끌이다. 이 광대한 곳에서도 아무도 아는 이 없이 파묻힌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구원하기 위해 다른 어디에선가 도움의 손길이 올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을 품은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세계이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종이 이주할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방문은 할 수 있다. 정착은 아직이다. 좋든 싫든 지금은 지구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할 유일한 곳이다. 천문학은 우리가 겸허함을 배우고 성품을 키울 수 있는 학문이라고 말해진다. 우리의 작디작은 세계를 아득히 먼 곳에서 찍은 이 사진보다 인간의 자만심과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훌륭한 증거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좀더 친절해야 한다는 책임을, 이 창백한 푸른 점을 보존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책임을 다짐한다. 이곳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고향이기 때문이다.
번역 출처 마리아 포포바 <진리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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