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버리 로그: 항해의 기쁨과 슬픔

거북이만 Bahia Tortugas

2024.02.11 | 조회 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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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거북이 만Bahia Tortugas에서 인사드립니다. 

거북이 만은 250해리쯤 남쪽의 막달레나 만Bahia Magdalena과 함께, 카보 산 루카스Cabo San Lucas까지 가는 길에 있는 가장 좋은 닻내림 구역입니다. 마치 열쇠구멍처럼 사방이 둘러막혀 있어, 거의 모든 방향의 바람을 막아 주죠.

이곳은 카보 산 루카스까지 여정의 1/3 정도 되는 마일스톤이기도 합니다. 엔세나다에서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한번에 쭉 뽑아서 내려왔습니다. 날씨가 많이 도와줬습니다.

 

세드로 섬

엔세나다에서 출항, 하루 야간 항해를 한 뒤 다음날 저녁에는 산퀸틴San Quintin이란 곳에서 닻을 내리고 밤을 보냈습니다. 이런 경우 하루이틀 쉬어 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 항해는 엔진을 거의 켜지 않고 세일로 왔기 때문에 피로도가 낮았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다시 닻을 올렸습니다.

원래는, 한번 더 1박 2일 야간 항해를 하고 닻을 내려 하룻밤 쉬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적어 둥둥 떠내려가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해 지기 전 도착이 아슬아슬하더군요. 어둠 속에 닻을 내리느니 차라리 가던 길을 이어 가기로 하면서, 결국 2박 3일 연속으로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엔세나다에서 총 4박 5일간 내려와 도착한 곳은 거북이만 북쪽의 세드로 섬. 조그만 마을 항구 방파제 안에 닻을 내릴 수 있었기에, 곧 찾아올 강풍을 여기서 피하기로 했습니다. 

닻 내린 호라이즌스호
닻 내린 호라이즌스호

엔세나다 친구 페르난도가, 거북이만 즈음 도착하면 기후대가 변한다고 하더니만 과연 날씨가 덥더군요. 항해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바닷물에도 들어가 봤습니다. 실은 닷새동안 씻지 못한 데에다, 마을에 샤워 시설도 없다기에 바닷물에 몸을 씻은 거였죠. 처음 물에 들어갔을 땐 차가워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으나 곧 온도에 적응되어 물에서 잠깐 놀기도 하고 나왔습니다. 

배에서 볼 때 아늑한 작은 마을 같았던 세드로 마을. 큰 기대를 안고 고무보트로 상륙해 보니, 그러나, 황량 그 자체였습니다. 사막 지역이라 나무나 풀이 없는 데에다 비포장도로의 흙먼지와 대충 지은 집들.. 이렇게 크기가 작은 마을도 황량한 느낌을 줄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만 얻고 배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분위기...
이런 분위기...

그리고 이틀간의 강풍. 방파제가 파도는 잘 막아주었지만, 돌풍이 순식간에 배를 크게 기울이기도 하고, 닻 내린 배를 180도 돌리기도 했습니다. 체인 긁는 소리에 심란한 밤을 보낸 다음날 보니, 아무래도 닻이 많이 밀린 것 같았습니다. 닻 내린 이후 배 위치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아래와 같은 경로가 그려졌거든요: 

방파제 안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배가 여기서 더 밀리면 위험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닻을 다시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엔진을 켜 예열하는 중에도 돌풍이 몰아쳐 배가 또 순식간에 180도 돌았습니다. 이 강풍에 이 좁은 항구 안에서 닻을 잘 내릴 수 있을까- 걱정하며 다시 전자해도를 켜 보니 그 사이 그림이 이렇게 변했더군요:

닻 위치는 푸른색이 아니라 노란색 마크였음
닻 위치는 푸른색이 아니라 노란색 마크였음

반달이 보였습니다. 처음 표시했던 닻 위치가 틀렸었나 봅니다. 이렇게 되면 닻이 밀린 게 아니라 닻 주위로 배가 잘 돌고 있다는 뜻이죠. 닻을 다시 내릴 필요가 없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거북이 만

며칠 연속으로 항해하기엔 날씨가 좋지 않아, 해가 있는 시간에만 조금씩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강풍이 잦아든 틈을 이용, 35해리 남쪽 거북이만에 도착했습니다. 유명한 곳이라 닳고 닳은 관광지 이미지가 있었기에, 날씨가 아니었음 그냥 지나갔을 곳이었습니다. 

이 곳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한몫 한 이야기가, 가여운 그링고들 상대로 사기 치는 주유 서비스 배였습니다. 닻 내린 배에 주유 배가 다가와 디젤 연료를 넣어주는 시스템인데, 바가지는 물론이고 주유 리터를 대놓고 속여 그링고 삥뜯는다는 엔리케라는 인물의 악명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두달 쯤 전 페이스북 커뮤니티에 엔리케의 실종 공고가 떴습니다. 

그동안 카르텔에 삥뜯기던 엔리케가 더 참지 못하고 카르텔 조직을 신고했다가 그만 살해당했다고 하더군요. 시체도 찾을 수 없고, 거북이만에 여러 채의 집, 토지, 배 등을 그대로 남겨둔 채. 가족들도 어딘가에 도망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마을 탐험을 위해 고무보트를 타고 해안에 접근하니, 선체에 커다랗게 '엔리케ENRIQUE'라고 쓰인 배가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습니다. 엔리케 이야기는 이 동네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해변 한가운데에 죽은 사람 이름이 저렇게 무심코 떠있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멕시코에서 항해를 하면서도 카르텔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엔리케의 배
엔리케의 배

 

항해의 기쁨과 슬픔

파도치는 해변에서 고무보트 상륙이 무참히 실패하면서, 아웃보드 엔진이 바닷물에 퐁당 빠지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해변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엔진이 물에 빠져 혼비백산이 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정이 뚝 떨어지더군요. 진흙 같은 모래와 지저분한 해초, 드문드문 쓰레기, 해변 정중앙엔 족히 200킬로는 넘어 보이는 거구 바다사자 시체까지.. 해변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니, 내려쬐는 강렬한 햇빛 아래 그늘 없는 흙먼지 가득한 길이며, 여기도 대충 지은 집들..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시골 어촌에 대한 기대는 이제 접기로 합니다.  

수퍼마켓에서 과일과 야채를 사 들고 터덜터덜 고무보트로 돌아오는 길에 어부 작업장을 발견하고는 혹시 생선을 파는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난 현지인 어부 루씨오 때문에 밉상이던 거북이만이 특별하게 변했습니다. 결국, 루씨오의 아늑한 집에서 점심식사도 하고, 샤워도 하고, 빨래까지 하게 되었죠. 그리고 아침저녁 서로 안부전화를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해변에 닻 내리고 있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할 곳이 있다는 것은, 떠돌이 배에게 얼마나 든든한 빽이 되는지 모릅니다. 

무려 1킬로에 20불
무려 1킬로에 20불

배에서 바하 캘리포니아 특산물인 랍스터와 와인을 한 잔 하며, 

"드디어 우리의 고생이 보상 받는 느낌이다, 그치?" 

기쁨에 벅차오르던 우리는 그날밤부터 놀이기구 타듯 흔들리는 배와 돌풍 소리에 심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람 방향도 남서풍에서 북풍까지 다양하게 변해, 두 번이나 거북이 만의 북쪽과 남쪽에 닻을 옮겨가며 배 안에서 흔들리고 있자니 이게 또 뭔 고생인가 싶습니다. 

강풍 너머 강풍, 그 뒤에 또 강풍. 바하캘리포니아는 겨울이 성수기라고 했었는데, 궂은 날이 참 많습니다. 이 곳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루씨오도 올해 같은 날씨는 처음이라며 혀를 찼습니다. 오랫만에 한국 뉴스를 보니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도 홍수와 악천후 소식이 있더군요. 역시나 슈퍼엘니뇨 때문인 걸까요? 날씨 좋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역시 힘든 겨울을 보내고 있나 봅니다. 그 남쪽에 있는 바하 캘리포니아에는 그나마 약화된 악천후가 오는 것 같습니다. 마리나가 있는 카보 산 루카스에 닿을 때 까지는 큰 무리가 없어야 할텐데요...

앞으로 며칠간 계속 강풍이 이어져, 거북이만 체류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정이 늦어지다가는 또 시간에 쫓기게 되려나 걱정입니다. 다음 뉴스레터는 다음 마일스톤인 막달레나 베이에서 인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편안한 일요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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