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버리 항해기

어리버리 북미 항해 1

밴쿠버에서 항해 준비하기

2022.08.22 | 조회 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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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오늘은 스키퍼 매뉴얼 본문 번역 대신 지금 하고 있는 항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마에스트로 페도테의 책을 열심히 번역하며 공부하던 사람이 실전에서 어떤 문제를 겪고 있고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지중해 vs 북미

새로 구한 뉴페이스 크루들은 졸지에 해적으로 돌변하고 만만찮은 강풍이 불어 고단했던 코르시카 크루즈. 진이 다 빠지던 2주가 지나고 하선한 지 겨우 이틀만에 또다시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캐나다 밴쿠버 땅을 밟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겨울잠이나 한달 내리 잤으면 좋을만한 상태였죠. 최근의 항공대란과 짐 분실 문제를 피해 가방도 핸드캐리 하나로 줄였습니다. 수영복 세 벌과 오일스킨 상하의, 잠옷과 간단한 세면도구 정도만요. 지중해였다면 여기에 물놀이 장비와 침낭 정도를 더해 크루즈를 시작해도 별 무리가 없었을 짐이긴 합니다. 

유럽은 도시 안에서는 비인간적인 폭염이 들끓지만 일단 요트를 타고 나가면 더위가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세일로 가든 엔진으로 가든 요트가 움직이는 한 항상 신선한 바람이 있고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바다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요. 캐나다는 도착해 보니 도시 안에서도 덥지가 않더군요. 함께 항해할 친구(선주)는 요트를 중심가 앞 바다에 닻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항할 때까지 고무보트 타고 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요트를 준비시키기에 편리한 위치였죠. 

그런데 날이 밝고 보니 지중해와 환경이 많이 달랐습니다. 도시 안의 바다라 깨끗하진 않겠지만 바다에 들어가 씻고 물탱크 물로 헹구는 정도는 가능할 줄 알았는데 이 곳의 물은 '갈색'이었습니다. 처음엔 "보기에만 이렇고 실제로는 그 정도로 더럽지 않진 않을까?" 생각했으나 현지 친구 왈, 바닷물이 박테리아 천국이라더군요. 눈이나 입에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충격적인 말도 들었습니다. 어짜피 날이 추워 바닷물 목욕은 못할 상황이었지만 나와 배를 둘러싸고 있는 물이 '더럽다'는 느낌은 참 생소하더군요. 지중해에서는 '놀이터' 같은 바다에 좀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 배를 탄다면, 이 곳의 바다는 더럽고 위험하고 닿으면 안 될, 경계의 대상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첫인상입니다)

 

요트

친구가 수년 전 중고로 구매한 요트는 오프쇼어 요트로 인기가 많다는 타야나 37피트입니다. 100년 된 나무배 같이 생겼지만 유리섬유로 만들어져 1980년 진수된 요트입니다. 사실 1980년이면 이미 모던한 요트들이 대세였을텐데 전통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북미 사람들 취향에 맞았는지 꽤 많은 숫자가 진수되었다고 합니다.

롱킬과 더블엔드(뱃머리 배꼬리 둘다 뾰족함) 선형, 붐이 달린 스테이세일 등 아주 오래된 배에서나 볼수 있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뱃머리에 두 개의 닻을 장착하고 있는 점도 신기했습니다. 동네 배들을 구경하니 다른 배들도 대부분 뱃머리 닻이 두개더군요(닻이 잘 안 잡히나?). 아방가르드한 요트에 대한 선망이 있는 유럽에 비해 옛스러운 요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어쩌면 이 경향이 단순히 심미적인 선호 때문이 아니라 옛날 배 선형의 내항성(seaworthiness)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여긴 태평양이고, 놀이터 지중해랑은 환경이 다를테니까요. 제가 롱킬 요트를 조타해 본 적이 없고 세일 조정을 위한 데크 피팅들이 너무 구식인 점도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오프쇼어 vs 하버-호핑

선주가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이 항해의 여정은 밴쿠버(캐나다 서부)에서 바하 캘리포니아(멕시코 서부)까지입니다. 그 둘 사이에 미국 서부 해안이 있죠. 북쪽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 구역이 많고 좀더 아래로는 샌프란시스코, LA와 샌디에고 등의 대도시들이 있습니다.

해안에서 100마일 정도 밖으로 나간 뒤 남하하는 오프쇼어 루트와, 매일밤 항구나 만에서 정박했다 아침에 출발하는 하버-호핑 루트 둘 중에 택하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이 항로를 처음 항해하는 대다수의 세일러들이 오프쇼어 루트를 택합니다. 이상하죠? 오프쇼어는 큰 파도와 바람이 있는 데에다 외부 도움도 받을 수 없으니 왠지 더 고수의 영역일 것 같은데 말이죠. 파도도 흔치 않고 조수간만의 차도 거의 없는 지중해와는 다른, 태평양 쪽 북미의 해양 환경 때문인듯 합니다.

북미 서해안에서 배가 정박할 만한 항구는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 많습니다. 이 경우, 육지에 닿기 위해서는 소위 '바 크로싱(bar-crossing)'이라는 것을 해야만 하죠. 강의 흐름, 조수차로 인한 조류, 태평양을 건너오는 바람과 파도, 강의 퇴적물이 쌓여 갑자기 낮아지는 해저 지형이 만나 물의 움직임이 난폭해지는 구간이 생기는데 이를 통과하는 것을 말합니다. 

https://www.cruiserswiki.org/wiki/Bar_Crossings
https://www.cruiserswiki.org/wiki/Bar_Crossings

굉장히 불안정한 해양 환경인지라 겉보기에 평온해 보일 때에도 바를 통과하던 배가 뒤집어지기도 한다더군요. 그래서 어려운 항구의 경우 현지 경험이 많은 세일러가 아니라면 입항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으스스하죠?

밴쿠버에서 항구 정박을 하며 내려가는 루트에는 소위 '어려운' 항구들이 다수 있고, 어떤 구간은 도저히 중간에 요트가 정박할 만한 곳이 없어 보이더군요. 정 안될 것 같으면 중간에 오프쇼어로 나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못할 상황이 되었답니다. 이유는 뒤에 나옵니다 ㅠㅠ

 

밴쿠버 홈리스들과의 공존

태평양에 나가 맞이할 미지의 환경은 아직 잠재적 두려움일 뿐이고, 당장 코앞의 문제는 여기 밴쿠버 시내 중심가에 닻 내린 요트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바닷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배의 물탱크에서도 물을 섣불리 쓸 수 없습니다. 물탱크가 하나이고 게이지가 없어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방법이 없거든요. 닻을 올려 근처 주유소에서 물을 채우고 돌아오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좋은 자리는 이미 가득차 있어 다시 돌아와 닻 내릴 곳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고무보트를 타고 나가 근처 시립 스포츠센터의 샤워실을 이용했지만 점점 샤워 빈도가 줄고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이웃 배들 주민들과 행색이 비슷해지게 됩니다. 

근처의 배들 상당수가 전혀 항해를 하지 않는듯 선체가 더럽고 데크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홈리스(노숙자)들의 배입니다. 한번은 고무보트 선외기가 고장나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누군가 "도와줄까?" 하며 노를 저어 오더군요. 가까이 다가와 말을 하는 걸 보니 치아가 이상했습니다. 친절한 홈리스였습니다. 선진 복지국가 캐나다에서는 이들이 길바닥에 나 앉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배를 사 준다고 합니다. 배에서 생활하고 종종 뭍에 나가 편의시설도 이용하기에 비교적 멀끔하고 안정돼 보입니다. 

한번은 혼자 배에 남아 있는데 바람이 많았습니다. 콕핏에 잠깐 올라갔는데 세상에! 웬 배가 우리 파워보트가 코앞에 있는 것입니다. 닻을 끌며 풍하로 밀려내려가고 있는 배였습니다. 
"지금 뭐하는거예요!!"
소리를 지르니 허름한 금발의 여자가 얼굴을 내밉니다.
"이게 뭥미? 우리 여기 되게 오래전부터 닻 내리고 있는데."
"당장 닻 먼저 올려요. 아님 우리 닻까지 걸고 밀려 내려갈 수 있다고"
"지금 남친은 나가고 없는데 어떡하라구요"
아.. 여자가 입을 여니 치아가 또 이상했습니다. 홈리스 배였던 것이죠. 기대를 접고 상대 배를 힘껏 미니 배가 우리 배를 간신히 피해 뒤로 밀려갔습니다. 
주위 배에 소리라도 질러 경고하라는 말도 무시하고 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이 배는 계속 밀려 내려가다 뒤에 있던 다른 배와 체인이 엉키고 맙니다. 떠내려오는 폭탄이 따로 없더군요. 배 주인이 뱃사람이었다면 없었을 문제인데요. 

 

귀걸이도 코에 걸면 코걸이

일년을 방치했었다는 요트를 준비시키는 일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요트를 청소하고 상한 식료품을 버리고 항해에 필요 없는 물건들을 치우며 요트를 비우는 작업은 끝이 없었습니다. 스키퍼 매뉴얼에서 읽은대로 마룻바닥판도 다 들어내고 실내 모든 수납장도 열어 보았습니다. 그 안은 백업 부품과 장비들로 가득차 있었지만 선주 친구가 각 수납장들의 물품 리스트를 작성해 놓아 나중에 찾기 쉽도록 해 놓았더군요.

나름 요트 점검도 해 보았습니다. 체인플레이트를 통해 빗물이 샜는지 선체와의 접합 부분에 약간 녹이 슬어 있었으나 전반적인 리깅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킬 볼트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롱킬 요트인만큼 킬이 빠질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배꼬리쪽 라이프라인의 한 쪽 터미널 나사선이 턴버클 안에 들어간 채로 동강이 나 끊어져 있었습니다. 한 곳이 손상되면 나머지도 건강하지 않다는 뜻이므로 전체 라이프라인 교체가 맞지만, 휴가 시즌 리거를 구하는 일도 간단치 않을 것 같고 이미 밴쿠버에서 일주일이 지나고 있어 하루빨리 출항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름의 매듭 지식을 총동원해, 동일한 지름의 폴리에스테르 라인으로 라이프라인을 대체했습니다. 

챈들러 샵에 갔는데 가격대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챈들러 샵에서도 싸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지만 캐나다는 체감상 그보다 50%는 비싼듯 했습니다. 라이프라인이 튼튼하지 않은 만큼 잭라인이 중요해졌는데 버클도 없는 잭라인이 15만원정도 하더군요. 미국에 들어갈 때 courtesy flag로 올릴 작은 성조기도 3만원이 넘습니다. 요트가 다른 나라에 갈 때 그 나라 규정을 준수한다는 의미로, 혹은 크루 중 다른 나라 사람이 있을 때 올리는, 에티켓 정도의 의미인 courtesy flag가 유독 미국에서는 필수라고 하더군요. 미국 사람들은 '깃발 민족'이라 성조기가 없는 배는 미운털이 박힌다나요.

둘 다 저 가격을 주고 사기는 왠지 억울해서 일단 샵을 나섰지만 다른 곳에서 대체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공구상가에서 화물용 폴리에스테르 벨트를 3만원에, 시내 기념품샵에서 작은 성조기를 2천원에 득템했답니다. 이에 더해 고장난 좌현 항해등까지 자동차 부품샵에서 해결했습니다. 초록색 우현 항해등이 고장났다면 대안이 없었겠지만 좌현의 빨간색은 자동차 후미등과 같더군요. 1마일 이상 가시거리, 실리콘으로 방수처리 된 전선까지요. 

 

예상치 못한 복병

이렇게 곧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생각치 못한 곳에서 항해가 엎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엉뚱하게도 미국비자입니다. 
읭? 한국인은 미국에 관광 목적으로 방문할 때 ESTA만 신청하면 비자 면제가 되지 않나요? 문제는 우리가 개인 요트로 미국 국경을 넘는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비자 면제는 미국 국경사무소에서 인정하는 '리스트에 있는' 운송수단을 이용해 온 한국인들에게만 해당됩니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그 밖의 미국 비행기들, 혹은 밴쿠버에서 출항하는 페리 등등.. 당연히 우리의 타야나 37피트는 그 리스트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서야 관광비자를 받으려고 알아보니 인터뷰 대기 시간이 400일이 넘습니다. 이렇게 요트 청소만 하다 집에 돌아가게 되려나요? 

다음주에는 다시 페도테의 스키퍼 매뉴얼 본문, 그 다음주 뉴스레터에서 어리버리 북미 항해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STAY TU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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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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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노98

    0
    over 1 year 전

    어떻게 비자문제는 잘 해결되었나요. 여정은 잘 진행되고 계십니까 ! 통영-독도 10일간의 여정도 녹녹치 않았는데 대단하십니다. 즐거운 여정이 계속되시길 응원합니다.

    ㄴ 답글 (1)
  • kssong12

    0
    about 1 year 전

    http://m.koreatimes.com/article/1455833 우연히 이기사를 읽다가. 어? 이거 듣고 본듯한 세일보트인걸? 해서 다시 찾아왔네요. 같은 보트인거죠? ㅎㅎ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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