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마드가 될 수 없다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고 노마드를 생각하다.

2021.06.07 | 조회 742 |
14
|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무려 13개월 동안의 캠핑카 제작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을 보면서 내가 캠핑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건지, 캠핑을 떠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건지, 그 영상을 물끄러미 30분 동안 넋 놓고 바라봐도 내가 어느 편에 위치하는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13개월동안 만든 캠핑카 작업영상 30분 몰아보기

 

캠핑카와 노마드가 사용하는 밴은 외관은 비슷하지만 용도로서 다르다. 캠핑족과 노마드족 또한 다른 위치에 서 있다. 한쪽은 취미고 나머지 한쪽은 현실이다. 캠핑카 쪽은 집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노마드는 사실상 집이 존재하지 않거나 집 자체를 거부한다.(영화 <노매드랜드>의 프란시스 맥도먼드처럼) 하지만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지점엔 나라는 인간이 한 지점에 서 있다. 내 시선의 출발점과 시선의 흐름이 향하는 곳은 모두 내 경험과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그들의 삶이 어떻다 한들,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도 오롯이 나의 기준점에서 기반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밴을 보면 캠핑카를 쉽게 연상한다. 소풍 가듯이 여기저기를 유랑하지만 돌아갈 곳이 분명히 있고 목적 자체도 여행 즉, 놀러 다니는 풍경을 떠올리고 만다. 사람들과 동떨어진, 그러니까 자연의 풍광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경제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내가 가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즐기는 그런 고독한 분위기를 연상하는 것이다. 그런 한계적 상황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내가 과연 밴에 삶 전체를 싣고 다녀야 하는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니 밴에 짐을 꾸려야 한다면 나에게는 다소 문화적인 취미, 호사스러움을 누릴 만한 장비들이 주 대상이 될 것 같다. 생각나는 대로 챙길 물건들을 나열해 보면, 스마트폰, 아이패드, 배터리팩, 충전 기기, 노트북, 카메라, 삼각대 등을 비롯한 전자기기들과, 최소한의 생명을 유지할 만한 캠핑 용품 따위들? 말하자면 부싯돌, 전투식량, 라면, 즉석밥, 코펠, 생수, 김치, 버너, 기름, 부싯돌 정도에 책 몇 권이 가미될 것이다.

그 물건 중에서 실용과 취미를 떠나서 다섯 가지만 뽑아본다면, 스마트폰, 책 몇 권(책은 여러 권이라도 묶어서 퉁 친다.), 생수, 라면, 버너 정도를 꼽겠다. 그중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책인데, 물론 책은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겠지만 밴은 사이드도 풍족할 테고, 책이 딱히 무겁다고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두꺼운 책 몇 권 가져가는 게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리라.

첫 번째는 단연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다. 자유를 찾아 노마드의 삶을 선택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가 빠질 수 없고,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지 그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한 권을 더 추가한다면 러셀의 <서양 철학사> 정도가 되겠다. 적당히 두꺼워서 가끔 베개로도 사용할 수 있을 테고 오랫동안 읽을 수 있을 테니.

소중한 물건 다섯 가지를 생각해 보니 공교롭게도 스마트폰이 1순위에 올랐다. 어쩌면 스마트폰은 내 집 그 이상의 역할, 밴의 역할 그 이상을 해낼지도 모른다. 통신이 가능하다면 또한 충분히 전원이 공급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못할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노마드 라이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면 스마트폰, 즉 네트워크에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공상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나에게 노마드는 발리 한 달 살이, 제주 한 달 머무르기, 싱가포르에서 몇 주 체류하기 이 정도로만 다가왔다. 단지 일하는 환경을 집과 상관없는 곳으로 바꾸는 것이 전부였다. 네트워크로 연결만 되어 있다면, 일 자체는 호텔이든 풀빌라든 모든 곳에서 구현이 가능했으니까, 말하자면 나는 노마드를 일의 연장, 장소의 변화로만 인식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노마드가 생존의 문제가 되고, 밴은 그들에게 여행의 수단이 아닌 거주의 목적이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만의 인식의 세상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다. 나는 편안한 내 집의 서재에 앉아 영화를 보며, 그들의 삶이 나와 이격 되어 있다고 한숨을 가끔 쉬는 것이다.


뉴스레터 발행인인 공심과 소통을 원하는 분들은

아래 단톡방에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단톡방 -> https://open.kakao.com/o/guo7aPSc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주변에 소개하기 📣

주변 사람들에게 '공대생의 간헐적 뉴스레터'를 추천해 주세요. 아래 사이트를 지인에게 추천해주세요.

https://brunch.co.kr/@futurewave/1136

오늘 글은 어떠셨나요?

피드백을 남겨주세요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14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일과삶

    0
    almost 3 years 전

    자유로운 영혼과 현재의 삶을 동시에 추구하시는군요~~ 멋지십니다~

    ㄴ 답글 (1)
  • 정지수

    0
    almost 3 years 전

    잘짜여져서 읽기 편안한 느낌이 드는 글이었어요. OT때 들은 목소리도 그렇고 글의 무드가 편안해서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ㄴ 답글 (1)
  • 옥돌여행

    0
    almost 3 years 전

    역시 네트워크로 연결된 스마트폰 세상을 포기할 순 없죠.^^밴 말고 캠핑카로 생각을 바꾸니 실어야 할 품목이 너무 많아지네요~

    ㄴ 답글 (1)
  • cenoha

    0
    almost 3 years 전

    아직은 나의 삶에서 관조하며 바라보기가 가능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했습니다. 자유로움, 낭만으로는 그저 내 위치를.대변할 뿐이겠죠.

    ㄴ 답글 (1)
  • veca

    0
    almost 3 years 전

    부싯돌에서 웃음이 나왔어요. 공심님이 끙끙 거리며 불을 만드시는 모습ㅎㅎ 분명 한번에는 안될 것 같은데요^^;; 공심님 함께 글 쓰시니 좋네요^^

    ㄴ 답글 (1)
  • 열말

    0
    almost 3 years 전

    편안한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저런 삶을 감내할 수 없겠구나 내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다 하며 한숨을 쉬었죠.

    ㄴ 답글 (1)
  • 삭제됨

    0
    almost 3 years 전

    앗, 댓글이 삭제되었습니다

    ㄴ 답글 (1)

© 2024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