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15. 마흔 일기 / 타투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위로

2023.03.10 | 조회 1.1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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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구독자님은 혹시 타투가 있으신가요? 저는 5개의 타투가 있는데(더 하고 싶어요) 그런 거 안 좋아할 것 같다거나 의외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그런데 그런 소리 듣는 걸 조금 즐기는 편이에요. 마치 빨간 페라리를 운전하는 할머니처럼 그 사람의 분위기나 외모, 나이와 안 어울릴 것 같은 반전 취향은 묘한 쾌감을 주더라고요.

2월이 되면 매년 튤립을 두어단 사는데 그러면서 제 팔목에 새겨진 튤립 한 송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어요. 오늘도 제 편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15. 마흔 일기 / 타투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위로

 

 

언니, 행복은 내가 만드는 거지요? 누가 가져다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거지요?”

울음을 삼키고 무작정 걷던 어느날 A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다른 사람이 선사하는 행복보다 내가 스스로 만드는 행복이 더 중요한 거라는 답장을 받고 싶었다.

그즈음 삶이 너무 팍팍해서 첫 타투를 했다.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내 손목에 영원히 피어있을 튤립 한 송이를 새겨 넣었다. 즉흥적인 건 아니었다. 섬세한 그림을 그리는 타투이스트를 팔로우하며 내 몸에 새겨질 그림을 상상한 건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키가 큰 남자 타투이스트는 말이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도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튤립에는 오만가지 결심과 의미가 있었으므로 더 할 얘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 후로는 한 시간 정도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 아픔을 잘 참는 편이라는 걸 감안하고도 놀랍도록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아서 깜빡 잠들 뻔했다.

완성된 튤립은 가느라단 줄기가 하늘거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줄기를 더 두껍게 그려달라고 했다. 실제로 튤립은 생각보다 굵고 단단한 줄기를 갖고 있으니까. 키가 큰 남자는 도안과 실제는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지금보다 예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상관없었었다. 나는 쉽게 꺾이지 않는 굵은 줄기를 갖은 튤립이 필요했다.

첫 타투를 끝내고 잠시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내 오른쪽 손목에 핀 꽃을 보니 A에게 보냈던 문자처럼 정말 나에게 행복을 선물한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언제든 볼 수 있는 꽃 한 송이가 평생 지워지지 않고 나를 위로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타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다. 10년쯤 되었을까. 막상 하겠다는 결심은 안 섰지만, 그림이 좋을지, 레터링이 좋을지, 위치는 어디가 좋을지 샤워하려고 욕실에 들어갈 때면 다 벗고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자주 훑어봤다.

이왕 한다면 잘 보이는 곳에 하고 싶었다. 스치는 눈길에 자꾸 걸려서 , 내가 타투를 했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깨닫고 싶었다. 그래서 튤립은 내 오른쪽 손목에 피었다. 글을 쓸 때 가장 습관적으로 눈길이 머무는 곳이었다.

선타투 후뚜맞(타투를 먼저 하고 나중에 두들겨 맞는다는 뜻)이라는 말처럼 타투를 하겠다고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지는 않았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타투를 하는데 엄마의 반응을 가장 걱정했다는 게 놀랍도록 신기했지만 미리 묻는다 해도 내 가족 중에 타투를 반겨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때는 타투를 이미 한 사람의 조언을 들어야 맞았다.

 

 

대학 때 쌍꺼풀 수술을 고민했었는데 애인과 가족 친구들 모두 결사 반대였다. 작은 눈이 매력이라며. 너는 지금 그 눈이 어울린다며. (에라이 그럼 네가 내 눈으로 살아라) 그때 나를 성형외과로 적극 인도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정적으로 설득된 말이 있었다.

쌍꺼풀 하지 말라는 애들 다 쌍꺼풀 수술 안 했지? 안 한 애들이 뭘 알아. 한 사람 말을 들어야지.”

과연 정답이었다. 결국 내 눈두덩이에 선 하나 더 긋는 것으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나를 선택했다는 만족감만 남을 뿐이었다. 식사자리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앉아있던 딸을 못마땅하게 보던 아빠도, 비상금을 털어 병원비를 내준 엄마도, 말리던 친구도, 싫다던 애인도 어차피 그들이 보는 나는 그대로였다.

타투도 그랬다. 내가 손목에 지워지지 않는 꽃 한 송이 그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물론 엄마에게 정말로 등짝을 맞기는 했다.) 남편은 못마땅해했지만 어쩌랴. 이미 타투는 새겨졌고 나는 만족했다. 가끔은 자랑스럽게 손목을 내보이고 다녔지만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할 정도였다. 10년을 고민했건만, 작은 타투 하나 새겼다고 세상이 뒤집어지지는 않더라.

 

 

타투를 할 때도 이미 타투를 한 친구의 조언을 참고했다. 그 친구도 잊지 못할 한 마디를 남겼다.

너도 이제 시작이구나. 세상에 타투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한 사람은 없거든.”

과연 명언이었다. 나는 첫 타투를 하고 난 후부터 내 몸의 여백이 비어있는 캔버스로 보였다. 다음 타투는 어디가 좋을까? 이번에는 레터링을 할까? 같은 사람에게 받을까, 새로운 스타일을 해 볼까? 심심하면 팔이나 다리를 사진 찍어서 핸드폰으로 그 위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보곤 했다.

두 번째는 커버업 타투를 받았다. 오른팔에 콩알만 한 갈색 점이 있었는데 단골 카페에서 사용하는 커피잔 사진을 찍어가서 그대로 부탁드렸다. 저번과 같은 타투이스트였다. 그래서 튤립 옆에는 갈색 커피 한 잔이 함께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현금이 생기면 다음 타투를 받기 위해 봉투에 따로 돈을 모았다. 오른팔에만 벌써 두 개였다. 이건 너무 발란스가 안 맞는 거 아냐? 빨리 왼쪽 팔에도 뭔가 하나 새겨 넣어야지.

세 번 째는 크레파스로 그린듯 귀여운 스타일로 작업하는 젊은 여자였다. 과묵했던 남자와 다르게 시술하는 내내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처음 누구에게 타투를 해줬는지 따위를 편하게 얘기했다. 덕분에 타투를 받으려고 누워있는 시간이 훨씬 편했다. 타투가 오래 지나면 푸른색이 도는 건 각질 때문이라며 로션을 잘 발라주라는 조언을 들은 것도 도움이 됐다.

시술 부위는 조금 아팠는데 사용하는 기계와 방법, 도안, 작업자에 따라 아픔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것도 이날 처음 알았다. 나는 아픔을 참으려고 잉어와 도깨비가 그려진 몸에 꼼꼼하게 로션을 챙겨 바르는 부지런한 조폭을 상상을 했다.

도안은 첫 아이가 다섯 살 때 그려준 그림이었다. 두 얼굴이 겹쳐진 그림이었는데 최근에 안 사실은, 링거를 맞으려고 누우면 두 얼굴이 링거 바늘을 쳐다보고 있다는 거다. 응원받는 것 같기도, 염려하는 것 같기도 해서 좋았다.

 

 

10년을 고민하던 소심쟁이가 소원하던 타투를 세 개나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느낌이었다. 흑백으로 된 그림만 세 개를 한 거야? 그것도 팔에만? 어서 다리에도 해야겠다. 그리고 레터링도, 색이 들어간 타투도 하고 싶었다. 그것까지만 하면 이제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타투는 중독적이다. 역시 하나만 한 사람은 없다는 경험자의 말은 진짜였다.

그날부터 다시 봉투에 돈을 모아가며 새로운 도안을 고민했다. 타투를 하려고 서울에 올라가는 것도 일이니 이번에는 두 개를 동시에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돈도 두 배로 모았다. 이번에는 커다란 말라뮤트 두 마리를 키우는 톰보이 스타일 여자 타투이스트를 선택했다.

지금까지 세 사람에게 타투를 받아본 결과 타투이스트들은 취향이 무척 뚜렷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 스튜디오를 둘러보거나 대화를 나눠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의 냄새가 났다.

왼쪽 팔에는 좋아하는 시의 문장을, 왼쪽 발목에는 아이들을 뜻하는 행성과 매화꽃 그림을 컬러로 그려 넣었다. 태명과 태몽에서 따온 것이었다. 내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아이들을 발목에 그려 넣고 팔에는 위안이 되는 문구를 새겼더니 갑자기 이름모를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마치 어느 부족이 신에게 바치는 기도 같았다.

내 몸에는 다섯 가지 강력한 주술이 새겨져 있다.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서늘한 날들에도 쾌활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what else will do

 

if the love one claims to have for the world be true?

 

So let us go on, cheerfully enough,

this and every crisping day,

 

though the sun be swinging east,

and the ponds be cold and black,

and the sweets of the year be doomed.

 

달리 무얼 할 수 있을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그러니 오늘, 그리고 모든 서늘한 날들에

우리 쾌활하게 살아가야지,

 

비록 해가 동쪽으로 돌고,

연못들이 검고 차갑게 변하고,

한 해의 즐거움들이 운명을 다한다 하여도.

 

첨부 이미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쓴 시는 메리 올리버의 어둠이 짙어져 가는 날들에 쓴 시의 일부분이에요. 글에는 그 부분이 포함된 시의 뒷부분만 적었어요.

참고로 발목에 하는 타투는 너-무 아팠답니다. 타투를 받으면서 대체 언제 끝나나 이를 악물고 기다린 건 처음이었어요. 살이 별로 없고 뼈와 가까운 부분에 받으면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쇄골, 발목, 발등 같은 부분 말이죠. 타투를 할 생각이시라면 참고하세요.

구독자님은 어떤 타투를 갖고 계세요? 어떤 타투를 꿈꾸시나요?

 

 

23. 3. 10. 

봄을 기다리며. 희정.

 


 

💌문화다방 소식

 

문화다방이 '생명의 숲'에서 감사패를 받았습니다. 뉴스레터를 읽어주시는 구독자 님 덕분입니다. 오랜 시간 글과 책으로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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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9 제주에서 독립출판 페어가 열립니다. 가족단위 관람객이 많이 오는 행사로 다양한 독립출판물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유채와 벚꽃이 만발한 4월의 제주를 계획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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