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며칠 전 여기는 폭설이 내렸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들과 나가 놀았어요. 아이들에게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은 나가 놀고 싶어서 못 이기는 척 나갔답니다. 비와 눈에 대한 대책 없는 사랑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아이들이 더 크면 제가 나가자 졸라야겠지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어요. 구독자님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특별한 계획도 없으면서 여전히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써서 보냅니다.
31. 마흔 일기 / 크리스마스
기적이 아니라 기억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받은 보석함이었다. 3학년인지 4학년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때가 확실한 건 딱 2년간 살았던 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관에서 가장 먼 작은방, 작은방 베란다 유리창에 커다랗게 자전거를 그렸다. 혹시나 산타 할아버지가 책상 위에 펼쳐놓은 내 일기장을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산타 할아버지 보라고 쓴 일기지만 산타 할아버지가 일기는 함부로 보지 않는 젠틀한 어른일지도 모르니 나름 철저하게 준비한 것이다.
베란다 유리창에 전지를 꼼꼼히 붙이고 거기에 커다란 자전거를 그렸다. 자전거 주변에는 별도 그리고 하트도 그렸다. 하루에 전 세계를 돌아야 하는 루돌프 썰매가 아무리 빨라도, 산타 할아버지가 아무리 바빠도, 이 그림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공들였다. 10살의 최선을 담아 만든 대형 현수막인 셈이다.
다음 날 아침 내 머리 위에는 한눈에 보아도 자전거보다는 한참 작은 선물이 놓여있었다. 자전거가 아니라는 충격에 선물을 열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나 만에하나 어쩌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자전거 보다 더 좋은 어마어마한 것이 들어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은 해야 했다.
반짝이는 비닐 포장지 안에는 육각형의 보석함 두 개가 있었다. 파랑색 하나 빨간색 하나. 자수가 놓인 천으로 마감된 보석함이었다. 예쁘긴 했지만 문구점에서 살 수 있는 종류의 평범한 것이었다. 펑펑 울었는지, 엄마에게 달려가 산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주지 않으셨다고 푸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아침의 실망감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꽤나 긴 시간 산타를 믿었던 딸은 엄마가 된 후에도 자주 그때로 돌아간다. 특히나 어린 시절 돈이 없어서 동네에 요구르트 아줌마가 오면 마주치지 않게 내 손을 잡고 빙 둘러 집에 갔다던 그때, 어린 딸에게 산타가 되어 주기 위해 애썼을 엄마가 생각나서 속이 따끔하다. 엄마가 고심해서 사줬을 수많은 선물들은 다 까먹고, 자전거 대신 받은 보석함만 기억한다는 걸 알면 우리 엄마는 서운해하실까 미안해하실까. 자전거 대신 보석함을 샀던 그 산타는 다음 날 아침 실망한 딸에게 하지 못할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얌전히 앉아 있기가 어려워 괜히 따뜻한 물 한잔을 들고 좁은 거실은 빙빙 돈다.
나는 눈치 빠른 아이가 아니었다. 철석같이 산타의 존재를 믿었다. 반 아이들과 일대 다수로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산타는 없어. 그거 그냥 엄마 아빠가 주는 거라니까."
"너는 아직도 그런걸 믿냐?"
우리 집에 왜 왔니 대형으로 내 반대편에 일렬로 선 아이들이 저마다 한 소리씩 했다. 꽤나 강렬한 기억이었던지 학교 정문 앞 언덕에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기 전 대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다. 산타를 믿는 쪽은 나 혼자였지만 나도 호락호락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산타는 진짜 있는데 얘네들이 다 아니라니까 더 억울해서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내가 우리 집 샅샅이 다 찾아봤는데도 선물이 없었어. 엄마 아빠가 선물을 샀으면 집에 뒀을 거 아니야. 그런데 없었다니까! (트렁크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1학년 때 엄마 아빠랑 저녁에 티브이 보고 있는데 집에 산타 할아버지가 왔어. (허술하게 분장한 동네 아저씨였다.) 진짜로.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정말 산타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유일하게 믿고 있는 마법 같은 일이었다. 일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었다. 그 환상을 깨뜨리려는 아이들이 진심으로 미웠다. 게다가 그 애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 산타는 진짜로 있는데 말이야.
겨우 1년 후에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산타는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쑥스러울 것도 없었다. 내가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을 때는 이미 산타가 있다 없다라는 대화 주제는 더 이상 친구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그제야 산타 할아버지가 쓴 '착한 어린이로 자라렴.' 카드가 엄마가 학교에 보내는 안내장에 공들여 쓰시던 글씨체와 같다는 걸 알았다. 우리 집에 왔던 산타 할아버지의 수염이 지나치게 하얀색이었던 것, 책에서 본 것처럼 배가 불룩하지도 않았다는 걸 떠올리며 진실의 퍼즐이 맞추다 끝내는 굴복했다.
하지만 5살이었던 어린 동생은 여전히 산타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산타의 조력자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믿지 않는 어린이는 더 이상 일찍 잠들지 않아도 괜찮았다는 점이 위안이 됐다.
동생이 잠들면 우리는 슬그머니 거실로 모였다. 엄마는 카드를 썼고 아빠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 트렁크에 숨겨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역시 트렁크였어.) 나는 잠든 동생의 머리 맡에 선물을 배달하는 극적이고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동생을 깨우거나 잘못해서 밟지 않도록 조심히 선물을 놓고 살금살금 방문을 닫으면 성공이었다.
24일 새벽이 지나고 있다는 것이, 이 역사적인 작전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야 했다. 산타가 없다는 비극은 금세 잊혔다.
우리 집 6살과 9살도 눈치 없는 엄마를 닮아 아직 산타를 믿는다. 특히 6살은 아주 확고하게 믿고 있다. 뻔히 티 나는 거짓말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보고 계실텐데. 진짜야?' 물으면 냉큼 사실은 뻥이라고 고백해 버리니까. 9살은 조금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 모르겠다.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어릴 적부터 핀란드 산타 마을 이야기를 주입식 교육으로 해왔는데 그 효과가 언제까지 갈런지.
산타의 조력자에서 승급해 진짜 산타가 된 후 나의 즐거움은 배가 됐다. 나는 이제 아이들의 기적 같은 순간을 기획한다.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을 알아내 미리 사두고 아무도 못 보게 포장해 두었다가 서로의 선물이 엇갈리지 않게 선물에 이름을 써 놓는다. 산타는 당연히 핀란드에서 왔으므로 번역기를 돌려 핀란드어로 쓰인 카드를 준비하는 치밀함도 빠뜨리지지 않는다. 선물을 머리맡에 놓아준 뒤 산타 어플을 켜서 진짜 우리 집에 산타가 다녀왔다는 증거도 남겨야 한다. 트리 앞에서 한 컷, 현관문 앞에서 한 컷, 각도만 잘 맞으면 베란다 문을 열고 썰매를 타고 나가는 사진도 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크리스마스 자체를 즐겼다. 나 혼자 받기만 하는 생일은 몸 둘 바를 몰라 차라리 도망가고 싶어 했는데 크리스마스는 달랐다. 이 생일은 전 세계 모두가 기뻐하는 날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행복을 빌고 설렘임과 고마움이 공기처럼 흘렀다. 공식적으로 공평하게 서로를 축복하는 날이 있다니.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어느 영화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구나! 연말이 되면 마음이 붕 떠서 동동 떠다녔다.
까치집 머리를 한 아이들이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났다가 자기 선물을 발견하고 잠에서 깨는 그 찰나의 순간이 벌써 보고 싶다. 아이들은 겨우 일주일 쯤 전부터 달력을 보며 손가락을 헤아리지만 나는 그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12월 내내 기다린다.
얼마 안 있으면 날짜 앞에 23이라고 썼다 지우는 날들이 오겠지요.
다음 편지에는 올 한 해 제가 읽었던 책 목록을 써보려고 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23. 12. 19.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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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는 책을 만드는데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 같아 무언가 제작해서 팔기보다 주변의 창작자와 1인 사장님들께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분들의 물건을 팔고, 열심히 소개해서 수익금을 기부하려고 합니다.
선물 꾸러미 1개에는 총 12개의 물건이 들어있고 60% 할인한 금액으로 판매중 이에요. 준비한 꾸러미는 총 20개인데 아직 5개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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