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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새해가 되기 전까지 열심히 연말의 따뜻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요. 구독자 님도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
9. 마흔 일기 / 화장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화장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 건 2년 전쯤이었다. 아이들과 그림책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빨리 수업이 끝나길 바라며 찬물로 얼굴을 벅벅 닦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수업 중에 딴생각이라니, 그것도 화장을 지우고 싶어 하는 생각이라니. 스스로 이렇게 불편해하면서 왜 굳이 화장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한때는 열심히 나를 꾸미던 때가 있었다. 번지지 않는 아이라이너를 찾기 위해서 파우치에는 얼마 쓰지도 않은 아이라이너가 여러 개 쌓여 있었고 해수욕장에 가도 화장하고 물속에 들어갔던 꼴불견이 바로 나였다. 용돈을 모아 유명하다는 샤넬 파운데이션을 사고, 맥 립스틱을 수집하기도 했다. 민낯으로 생활한 지 오래된 지금의 나만 보아온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대학시절 항상 함께 등교하던 친구는 넌 왜 지각하면서도 풀 메이크업을 하고 오냐고 따졌었다. 지각한 나를 기다리면서 오늘도 마스카라를 하고 오면 참지 않겠다 속으로 벼르고 있었던 날도 있다고 한다. 그 친구가 나를 끊어내지 않고 아직 친구로 삼아주고 있는 걸 보니 그날은 다행히 마스카라는 하지 않았나 보다.
매일 화장을 하지 않게 된 건 첫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어른이 쓰는 기초화장품이 아이에게 해가 될까 싶어 로션도 아이가 바르는 걸 같이 바르기 시작했다. 가끔 나갈 일이 있어서 색이 있는 립밤만 발라도 아이의 동그란 볼에 남는 끈적한 자국이 싫어서 얼굴을 부비고 싶은 걸 겨우 참았는데, 그 잠깐이 견딜 수 없이 아쉬웠다. 매일매일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로 마음껏 아이에게 치근덕대고 싶었다.
출근하는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화장을 꼭 해야 하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내 화장품들은 서서히 유통기간이 지나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신제품도, 인플루언서가 광고하는 피부 톤을 바꿔준다는 획기적인 크림도 모두 관심 밖이 되었다. 티브이에서 보는 깎아놓은 듯 아름다운 여자 연예인이나 가끔 길을 가다 만나는 눈에 띄게 예쁜 여자를 보아도. 다른 우주의 일처럼 느껴졌다. 내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넘쳐났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산지 오래되었더니 이제 안경을 벗고 가까이서 내 얼굴을 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중학교 때부터 그렇게 날 괴롭히던 여드름은 여전히 이마를 떠나지 않았고, 여드름은 있었지만 기미는 없다 생각했는데 주근깨인지 기미인지 가득하다. 기름종이 없이는 외출도 안 했던 타고난 지성피부라 모공은 또 어떻고. 예전이라면 거울 앞에 붙어서 팩을 해야 하나 피부과에 가야 하나 고민에 빠졌겠지만 이제는 초연하게 다시 안경을 쓰고 거울에서 잠시 멀어지기를 택한다. 그럼 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이 세상에 누가 내 얼굴을 나만큼이나 가까이 들여다볼까. 하물며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가까이하는 이는 분명 나를 사랑하는 사람일 테니, 내 좁쌀여드름이나 모공의 크기 같은 것으로 사랑의 크기가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피부보다, 주름이나 윤곽 같은 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화장으로 시작해서 외모를 가꾸는 모든 것에 심드렁하게 되고 나니 거대한 패션사업이 뭔가 비정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왜 옷 한 장에 책 열 권 가격이 드는지, 왜 가방 하나에 책 백 권 가격이 필요한지, 이게 합당한가 의문스러웠다. 유행하는 패션이나 악세서리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인가. 나는 전 국민이 오징어 게임처럼 모두 똑같은 체육복만 입고 생활해도 상관없었다. 옷은 그저 계절에 맞고 편하면 그만이었다. 나를 경직되게 만드는 것을 예쁘다는 이유로 소비하지 않게 되었다.
한동안 신발장에 화석처럼 존재했던 하이힐도 모두 버렸다. 구두를 하나하나 꺼내면서 이제는 낯설어진 과거의 나와 하나씩 이별했다.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구두가 필요했다. 학부모 상담을 가거나, 가족사진을 찍거나, 결혼식부터 장례식까지 해결해 줄 단 하나의 구두. 매일 크록스와 운동화만 신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단순히 굽 높이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발뒤꿈치를 까져가며 아픔과 냄새를 참아내야 하는 건 구두가 아닌 스타킹의 문제였다. 남성화가 여성화 보다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양말 때문이 아닌가. 나에게도 내 발을 보호해줄 갑옷 같은 양말이 필요했다. 그리고 양말을 신고 신을 수 있으며 어느 옷차림에나 어울릴만한 클래식한 구두가. 그렇게 구두 한 켤레가 다시 텅 빈 신발장에 자리 잡았다. 내가 가치를 두는 것이 명확해질수록 삶은 심플해지는구나. 가벼워진 옷장과 신발장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화장을 하지 않고, 양말을 신고 구두를 신게 된 이후 또 하나의 변화는 매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반곱슬로 평생을 살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소가 핥고 지나간 것 같은 스트레이트 파마가 나오던 시절부터 구불거리던 머리는 쫙쫙 펴주던 그 획기적인 시술이 주는 쾌감을. 친구들은 최양락 단발이라 놀려도 폭탄 맞은 듯 미쳐 날뛰는 머리보다는 차라리 최양락이 되고 싶었던 시절을. 지금은 볼륨 매직이 나와서 얼마든지 자연스러운 생머리가 가능하지만 몇 달에 한 번씩 미용실 의자에서 반나절을 보내며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뭐라고. 나는 평생 내 삶의 몇 년을 미용실 의자에서 보내는 걸까.'
그러다 CGM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Curly girl method의 약자로 직모만이 아름답다는 기준에서 벗어나 다양성에 가치를 둔 인식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 같은 것이 있는데 꽤 복잡했다. 계면활성제와 실리콘이 들어있지 않은 헤어 제품을 쓰며 드라이기나 빗질을 사용하지 않고 극세사 타월 사용하기 등등 곱슬머리의 컬을 장점화하기 위해 나름의 노하우가 유튜브와 블로그에 가득했다. 곱슬 전용 헤어 제품을 직구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싫었으므로 나는 그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그런 사람들의 변화된 헤어스타일을 보며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기쁨만 누렸다. 그리고 그들의 조금 덜 부스스해진 사자머리가 꽤 괜찮아 보였다. 생머리가 아닌 곱슬머리인 채로 살아도 괜찮구나.
그때부터 매직을 하지 않고 지냈다. 내 머리는 여전히 부스스하고 꼬물거린다. 이러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으면 어느 날 또 미용실을 찾아가 시끄러운 속을 진정시키듯 시원하게 쭉 뻗은 머리를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조금 나로 사는 것 같은 마음이다. 긴 생머리로 가뭄에 콩 나듯 어려 보인다거나,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느낀 적 없는 만족감이었다. 그저 나로 살아가는 기분, 그게 아름다운 나로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이런 내 변화는 해방이 아닌 가치의 이동에 가깝다. 첫아이를 품에 안고 한 몸처럼 붙어있으면서 나에게 집중되었던 관심이 옅어지고 넓어지고 이동한 결과. 오히려 나는 화장을 곱게 하고, 머리를 공들여 세팅한 이들을 좋아하는 모순적인 모습도 갖고 있다. 그들이 여전히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 어쩐지 귀엽다. 날이 추워도 패딩 대신 코트와 머플러를 두르고, 또각또각 허리가 곧게 펴진 걸음걸이로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외모뿐 아니라 삶 전체를 정성껏 매만지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게다가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와 곱게 화장한 할머니의 빨간 립스틱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나는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일 뿐이고 그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싶은 사람들일 뿐이다. 모두가 각자의 아름다움을 쫓아 살면 되는 거니까. 이렇게 각자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면 좋겠다.

👞단 하나의 구두
제가 산 신발은 헤이더비라는 구두에요. 무이는 가방을 만드는 브랜드인데 평소 애정을 갖고 있다가 구두를 만드는 과정을 보며 구입하게 되었지요.
💈 CGM
세상에 나쁜 곱슬머리는 없다 라는 기사에요. 잘 정리되어 있어 공유해요. CGM이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나 블로그를 찾아보시면 직접 경험한 분들의 생생한 후기가 많습니다.
🌝 닥터 슈라멕 블레미쉬 밤
한때는 강남에 있는 피부과를 주기적으로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요. 정말로 예뻐지기는 하더이다. 피부과에서 실장으로 일하는 친구 말대로 피부와 몸매는 돈으로 해결 되더라고요. 물론 돈과 관심도 함께 있어야겠지요. 그때 피부과 시술을 받고도 바를 수 있었던 게 바로 이거였어요. 저는 화장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이걸 바른답니다. 저처럼 화장하지 않는 분께 도움이 될까 하여. 😉
그럼 이만. 다음 편지도 기다려주세요.
22.12.12. 희정.
💌문화다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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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6년째 이어가고 있는 이벤트인데 이번에는 제 뉴스레터 수익 전액과+a를 기부하려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내주신 구독료와 커피 쿠폰도 수익화 하지 않고 잘 모아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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