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큰일이 날 뻔 했습니다. 세탁기가 꽂혀 있던 멀티탭이 스파크를 튀기며 타버렸습니다. 다행히 제대로 불이 붙기 전에 빠르게 조치하여 멀티탭 단추만 살짝 녹고 그을린 정도로 끝이 났는데, 하마터면 집에 불이 날 뻔 했다는 생각에 가슴 철렁했습니다.
집에 불이 난다는 건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신석기시대 동남부 유럽 사람들은 오히려 집을 일부러 태워버렸던 것 같습니다. 수십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우수수 죽어버리는 대나무 숲처럼, 신석기시대 동남부 유럽에선 75~80년마다 온 마을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동남부 유럽의 넓은 지역에서 수많은 화재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온 마을이 타버리는 일이, 기원전 6500년부터 기원전 2000년까지 4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흔적이 발견되는 지역을 지도에 나타내 보니 굉장히 넓은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소실가옥지평(Burned house horizon)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사고나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부러 자기 집에 불을 낼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증거들은 스스로 불을 냈다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고나 전쟁 때문에 불이 났다면 불에 탄 집터에서 인골이 함께 발견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전쟁의 경우 창이나 활에 공격당한 인골이 있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집에 불이 날 것을 미리 알고 피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재 현장에서는 함께 탄 인골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 사고로 난 불이라기에는 불이 너무 셌습니다. 이 지역에는 집을 짓는 데 쓴 점토가 불로 인해 도자기처럼 변해버린 잔해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 주택 모형에 원시적인 화덕에서 난 사고로 불이 난 상황을 재현해 실험해 보니 벽의 점토 중 1% 미만만이 도자기처럼 구워졌습니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만큼 점토가 구워지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양의 연료가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일부러 비용을 들여 집을 태웠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스스로 불을 냈던 걸까요? 선사시대 유적이니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있습니다.
먼저 앞서 말했듯 진흙 벽을 불에 구우면 도자기처럼 단단해지니, 이것을 활용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습기와 곰팡이로부터 집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잔해 속에 귀중품들(신석기 스타일이겠지만요)이 남아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불을 지른 것이라면 귀중품들을 꺼내고 나서 불을 지르지 않았겠느냐는 반박이 있습니다.
방역설도 있습니다. '골든카무이'라는 만화를 보면 결핵 환자의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질병, 해충, 악마적인 무언가를 쫓기 위해 불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입니다.
공간 확보를 위한 철거였을 수도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마을을 태워버린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으로 떠난 게 아니라 그 위에 다시 집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기존 집이 좁아서 허물고 리모델링을 한 것은 아닐까요?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그들이 집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어서 주기적으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치렀다는 가설입니다. 이를 '도미사이드(Domicide)' 또는 '도미타나시아(Domithanasia)'라고 부르는데, '집 살해' 또는 '집 안락사'라는 뜻입니다. 만화 '원피스'에서 해적단이 그동안 탔던 배를 더 이상 탈 수 없게 되었을 때 온 마음을 다 해 배를 보내준 것처럼, 이들도 적절한 시기마다 집을 숭고하게 보내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현대에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들 불 조심 하시고, 화재 시 행동 요령을 다시 한 번 숙지해 두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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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노트, 대나무는 수십 년에 한 번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온 대나무가 같이 죽습니다.
Wikipedia, Burned house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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