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담>

나와 당신 사이의 담 허물기

2021.12.07 | 조회 298 | 1 |

미지의 담

평범하고도 특별한 삶을 엿보는 일

안녕하세요. <미지의 담>을 이끄는 미지입니다.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메일링을 시작하게 되니 처음 메일링을 했던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도 발송 몇 시간 전부터 덜덜 떨고 있었거든요.

'코로나 시대'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지도 약 이 년 정도가 되었는데요. 그동안 저는 타인의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되었어요. 원래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람'에 대한 범위가 조금 더 넓어졌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미지의 담>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 함께 나누기 위해서요.

인터뷰는 처음이라 진행이 조금 미숙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인터뷰이에 대한 정보(나이, 성별 등)는 최소한으로 할 예정이니, 오로지 오고가는 질문과 답변을 통해 인터뷰이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해 보시면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인터뷰이가 인터뷰 도중 스스로 밝히는 정보들에 대해서는 제한하지 않습니다.)

서론이 조금 길었죠? 그럼 첫 번째 인터뷰 시작해 볼까요?

 

 

 

안녕하세요, 지형 씨. 먼저, 인터뷰를 읽고 계실 분들에게 자기소개부터 부탁 드려요.

안녕하세요. 클래식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클래식 전공자 박지형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고 기뻐요!

 

근황 토크부터 해 볼게요. 최근 지형 씨의 화두는 무엇인가요?

최근의 이슈는 역시 영화네요. 저는 취향이 극명한 편이라 작품을 꽤 심하게 편식하는데요. 불호에 속했던 대표적인 소재가 히어로, 액션, 판타지였어요. 세 가지만 봐도 제가 마블 영화를 즐겨 보지 않았던 이유가 설명되죠.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더라고요. 많은 사람이 저렇게까지 열광하는 이유가. 연주회도 끝났고 디즈니 플러스도 결제했겠다, 정주행을 결심하고 하나씩 보기 시작해서 지금은 엔드게임까지 마쳤네요. 역시 취향은 아니었지만, 나름 즐겁게 봤어요. 참고로 저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스타로드가 마음에 듭니다.

 

저도 마블 영화를 즐기는 편은 아닌데, 아이언맨은 좋아해요. (웃음) 그럼 좋아하는 영화 장르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세요!

어떤 소재가 좋다, 장르가 좋다, 라고 확언할 수는 없어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줄곧 대답해 오긴 했지만, 범주가 넓어서 '이 정도면 다 보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선과 사랑이 이기는 걸 보여주는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라면 가리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게 가장 대답스러운 답변이 될 것 같네요. 

 

선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가 닿는 것 같아요. 지형 씨가 본 영화 중에 그런 것을 가장 잘 그려낸 영화가 있다면 어떤 영화일까요?

흥행한 작품 중에서는 단연코 인터스텔라네요. 원더, 블라인드 사이드도 있고요. 말하고 보니 모두 가족 영화라 웃기기는 한데, 저는 가족애를 이길 사랑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연인 간의 사랑도 좋죠. 그 안에서 치유가 일어난다든가 성장한다든가 하는 스토리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고요. 그런데 몇 번이고 실망해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건 가족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서 피로 이어졌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 위대한 거기도 하죠.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고 약 이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지형 씨의 삶에서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은 어떤 것일까요?

정말 많은 부분이 바뀌어서 하나를 꼽으려고 하니 참 어렵네요. 전공, 인간관계, 건강, 나열하면 끝도 없이 이어질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그래도 가장 큰 변화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단순히 영화를 만들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 에서 그쳤던 목표가 더욱 구체화 되었죠. 작년에 극단에 들어가서 배우로 극을 올리게 되었는데요.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 괴롭다. 그렇지만 계속하고 싶어!’를 수도 없이 느꼈어요. 거의 매 순간이요. 결론적으로는 좋은영화와 좋은글을 쓰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됐어요. 이것도 두루뭉술한가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작품을 보고 인생이 바뀌거나, 작품을 이유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것이거든요. 마냥 단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이지 않은 이런 목표를 가지게 된 게 제게는 큰 변화예요.

 

극 속의 캐릭터로 살면서 '좋은' 영화에 대한 욕심이 생겼군요. 그렇다면 '좋은' 글을 목표로 하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글이 없으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아요. 좋은 콘티, 좋은 시나리오가 없는데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없죠. 영상미는 좋을지 몰라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작품이 될 거예요. 그런 작품은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의미나 주제가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라는 의문이 드는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거죠. 아마 그런 점 때문에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최근의 화두를 영화로 꼽을 만큼 영화를 좋아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외에 책을 좋아해서 헌책방에도 자주 간다고 하시던데, 각각 최초로 좋아하게 되었던 계기나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 있나요?

아직도 선명해요. 제가 10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생일 선물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주셨던 선물이 세계 명작 중 하나인 제인 에어였어요. 보통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애정을 갖게 되기 마련이잖아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잘 모르겠는 단어들의 나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었거든요. 그냥, 좋아서. 지금도 책을 사랑하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그냥, 이라고 대답할 것 같아요. 여전히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책을 대하고 있으니까요.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영화 작품은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인데요. 영화라는 예술 장르를 좋아하게 된 건 18년도 겨울이었어요. 그냥 막연하게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이 좋아졌어요. 영화를 보다가, 그렇게 갑자기요. 어떤 영화를 봤는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기억은 흐릿한데 감각은 확실하다고 할까요. 저는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를 인생을 바꿀 기회를 잡은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거창한 상업 영화든 저예산 독립 영화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정말 놀랍지 않나요? 영화를 사랑하게 된 순간이 제 인생의 목표가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고, 순간이 되었어요.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죠.

 

최초의 인류를 만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것을 주고 싶으세요? 그 이유는요?

이라는 개념? 이건 주고 싶다, 라기보다는 알려 주고 싶다, 이긴 하네요. 제가 좋아하는 일본 아티스트인 星野 ‘Pop virus’라는 노래에서 시작은 불꽃도, 막대기도 아닌 음악이었어라는 가사가 나와요. 생존을 위한 발명과 발견이 아닌, 행복과 위로가 시작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근사하다고 생각해요. , 막대기 같이 살아남기 위한 도구들은 언젠가 얻게 되어 있지만, 음악은 다르거든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들만의 세상에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행복을 놓치고, 쉼을 놓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음악이 가장 직관적인 을 줄 수 있는, 단시간 고효율 예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시작에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외로움, 그리고 생존과 싸우는 최초의 그들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니까요.

 

지형 씨가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당연한 것은 없다.”예요. 사람마다 살아온 인생은 모두 다르고, 그 인생 속에서 경험한 것은 천차만별이잖아요. 내가 그렇다고 해서 남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는 전제를 없애고 사람을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예컨대 그런 거죠.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다거나 사용한 적이 있다고 당연히 생각하고 말을 하게 되면 이해가 잘 안 될뿐더러 어쩌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나 환경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저와 대면하는 순간만큼은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전부예요.

 

서른이 되기 전에 이루고 싶은 버킷 리스트 다섯 가지를 알려 주세요.

빚 청산하기. 아마 저희 집 빚의 30% 정도가 제 악기 몫일 거예요. 빨리 빚을 청산하고, 제 악기를 갖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부모님도 그만 힘드셨으면 좋겠고요.

골격근량 30kg 달성하기?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요? 운동을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이루고 싶네요. 작년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해서 더 간절해요.

뮤즈 만나기. 이건 예술에 심취한 사람 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진심입니다. 단순히 애인을 만들고 싶다, 가 아니에요. 오히려 비즈니스적 관계죠. 정신적 교감을 살짝 곁들인. 얼굴을 보면, 손을 잡으면, 곁에 있으면 영감이 떠오르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저도 그 사람의 뮤즈가 될 수 있다면 영광일 것 같고요.

일본에서 1년 살기. 목적이 힐링이든 일이든 상관없이 일본에 가서 살고 싶어요. 정말 오랫동안 꿈꿨거든요. 아마 어린 시절에 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크겠죠? 최근에 구독하기 시작한 메일링인 도쿄일인생활의 영향도 있을 거고요. 여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실제는 다르다는 걸 저도 알고 있지만요.

유학 가기. 이건 곧 실현될 것 같아요. 2년에서 4년 내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지금 당장은 제가 준비가 덜 된 상태라서, 가면 바로 돌아올 게 뻔하기 때문에……. 언젠가 제 유학 생활에 대한 얘기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뮤즈라는 단어에서 궁금해졌는데요. 지형 씨는 영감이 필요할 때 무엇을 하나요?

아무것도 안 해요. 다른 사람의 창작물에서 창작의 영감은 받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글을 쓰기 위해 영감이 필요하면 글을 읽지 않고, 극을 위해서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거나 연기를 해야 할 때 영화나 드라마를 절대 보지 않아요. 그저 계속 생각할 뿐이죠. 필요하다면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할 수도 있지만, 의존하지는 않아요. 즐기지도 않고요.

 

만약 지형 씨에게 영영 악기를 연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어떤 방식으로 음악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게 될 것 같으세요?

욕구를 표현하려면 욕구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이상할 정도로 없어요. 전공자가 무슨 말이냐, 전공할 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 아니냐, 하시겠지만, 저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음악을 선택하게 된 계기 자체가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지 않나?’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음악에 대한 욕구가 있기 어렵죠. 그리고 욕구가 있다고 해도, 다른 방식이 연주를 대체할 수는 없어요. 음악에서 오는 감각은 영화에서도, 글에서도 찾을 수 없거든요. ‘오직인 거예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 시절을 회억하지 않을까요? 적당히 미화된 기억을 평생 품으면서요.

 

지형 씨는 어떤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나요? 꼭 연애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니더라도요.

알아채 주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요. 섬세함을 지닌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죠. 저는 감정의 변화가 워낙 잦고 폭도 넓은 편이라 저와 가까운 사람들도 버거워할 때가 많아요. 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렵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힘들어하고요. 그런 저를 속속들이 다 알아주고, 배려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금방 사랑에 빠져 버리죠. 섬세함은 예민함과 맞닿아 있는 성상이기 때문에 저도 그만큼 그 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게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된다면야 오히려 환영이죠.

 

이번에는 연애적인 사랑이 궁금해져요. 첫사랑이 있나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첫사랑은 아직 없습니다. 연애 상대라고 하면 몇 명 댈 수도 있겠는데, 정말 보기만 해도 사랑해서 죽겠는 사람은 현실에서 아직 못 만났어요. 넷상에서의 만남은 이상한 곤조가 있어서 인정하고 싶지 않네요. 스스로. 

 

가장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던 때와 가장 마지막으로 부끄러웠던 때는 언제인가요?

실은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이 거의 없어요. 기억의 시작이 8살이라서....... 글쎄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울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한 지 2년 정도 됐을 때였을 거예요. 초등학교 때는 알림장이라는 걸 쓰잖아요. 그 내용을 미처 못 적어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다른 아이에게 보여 달라고 부탁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남자아이에게 보여 달라고 했는데 초장부터 거절하는 거예요. 그때 너무 속상해서 엉엉 울었어요.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였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고, 거절당한 것 자체가 상처였거든요. 그 사건 덕분에 제 초등학교 4학년 생활기록부에는 울음이 많은 아이라고 적히게 됐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부끄러웠던 때는 꽤 최근이네요. 10월에 연주회를 했었는데요. 제 실력이 가장 뒤처지는데, 손님은 가장 많았어요. 연주회가 끝나고 난 후에 친구들과 인사하고, 멀리서 보러 와 준 언니들을 배웅하고 나서 집에 가는데 견딜 수 없이 부끄러운 거예요. 빈 수레가 요란한 꼴이 됐다고 생각하니……. 정말 부끄러워서 일주일 동안 후회했어요.

 

그동안 걸어왔던 길에 대해 헌사를 바친다면 쓰고 싶은 문장들이 있나요?

제가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해 준 말이 있어요.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없는 채로 안아 버리면 돼.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져 버린 건 져 버린 대로 둬. 슬펐던 경험보다는 이겨 낸 날과 사랑한 날을 생각해 줘.’ 저는 이 말을 헌사로 쓰고 싶어요. 너무 오래 슬퍼했고, 그런 슬픔들이 미워서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나날을 지내오면서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후회가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그런 과거를 모두 괜찮다고, 그대로 두고 그것까지도 안아주겠다고 한 그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익어 버릴 정도로 뜨거워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해요. 그동안 걸은 현재의 나에게, 걸었던 과거의 나에게 꼭 말해 주고 싶어요. ‘이겨 낸 날과 사랑한 날을 생각하면서, 앞으로도 걸어가자. 얼마나 굽이졌는지 가늠도 할 수 없는 그런 길을.’이라고.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 볼까요?

올해가 당신에게 괜찮은 해였나요? 라는 질문을 매년 연말에 스스로에게 해 봐요. 이변 없이 늘 단호히 NO! 였는데요. 올해는 SO-SO, 라고 하고 싶네요. 엄청난 다정과 섬세함을 지닌 사람과 좋은 감정을 나눠 보기도 했고, 좋은 시집을 많이 읽었고, 연주회도 두 번이나 했고, 메일링에 인터뷰이로 참여하는 영광도 누렸고, 돌이켜 보면 좋은 것들이 잔뜩 있었거든요. 물론 우울증과 불안 장애, 수면 장애와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좋은 것들이 다 흐려질 만큼 힘들기도 했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의 끝은 별로였다는 점이 슬프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던 해였어요. 여러 부분에서 잊지 못할 해가 될 것 같네요.

 

지형 씨가 다음 인터뷰이에게 궁금한 점이나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올해 만났던 작품 중 가장 최악은? 같은 질문을 하고 싶어요. 다음 인터뷰이분이 어떤 분이신지 저는 잘 모르다 보니 심도 있는 질문을 하기에는 어려워서. 저는 망한 영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하는 그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어서, 일까요? 모쪼록 엄청나게 망한 영화는 만나지 않으셨기를 바라면서,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지형 씨의 최근 한 달을 보여 주는 사진 세 장을 공유해 주세요. 그리고 그 사진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부탁해요!

자랑하고 싶어서 첫 번째 사진으로 변영주 감독님의 사인을 들고 왔습니다. 11월 초에 광주여성영화제에 다녀왔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는 장편 독립영화를 보고 씨네페미클럽을 이어서 방청했는데, 영화를 보다가 울어버린 바람에……. 엉망인 얼굴로 변영주 감독님의 사인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사진이랑 똑같으세요! 그리고 조금 더 키가 크시고요. 방송에 나오시는 것보다 훨씬 유쾌하신데, 덕분에 울다 웃어서 정말 곤란했어요.

두 번째 사진은 박정대 시인의 시집 삶이라는 직업에 실린 나의 플럭서스라는 시 일부분인데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 담겨 있어서 들고 왔어요. 저는 한 시인에게 꽂히면 그 시인의 시집을 모조리 사들이는 취미가 있는데요. 올해 곽은영 시인을 이어 박정대 시인의 시집을 드래곤볼하게 되었어요. 박정대 시인은…… 뭐랄까요.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 같아요. 음악, 혁명, , 사랑, 바다, 담배……. 시를 읽다 보면 이 사람이 지독한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 순간이 정말 좋아요. . 사랑하게 돼 버렸습니다. 그렇게 됐어요.

세 번째 사진은 헌책방에서 산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입니다. 집 근처에 헌책방이 생긴 지 3달 정도 됐어요. 3권의 책을 이곳에서 구입했는데, 저는 이제껏 새것의 상태로 보관하는 것에 집착할 정도여서, 책에 밑줄도 잘 안 긋고 책갈피조차도 끼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제 책과 정반대로 보관해진 헌책에는 추억이 담겨 있었어요. 전 주인이 접어둔 책의 끄트머리라든가 쪽수에 작게 그려진 동그라미라든가 앞쪽에 남겨진 책을 구입한 날짜와 작은 메모……. 책의 가격을 떨어뜨린 요소들 하나하나가 제게는 너무 사랑스럽게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제 책에 저와 제 추억을 담아 보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사게 되거나 선물 받게 될 책에 날짜 정도는 적어 보려고요.

 

2년 전의 지형 씨와 2년 후의 지형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솔직히 과거의 저에게는 아무 말도 해 주고 싶지 않아요. 대단한 조언을 해 줄 만큼 2년 사이에 성장하지도 않았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필요를 못 느끼겠어요. 2년 전의 저도 그걸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거고요. 꼭 전해야 한다면 2년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채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네요. 너는 네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2년 후 저에게…… 는 염치없는 바람만 많아서. 건강해지고, 돈도 잘 벌고, 유학도 가고, 사랑도 시작하고,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은 다 누리고 있는 상태였으면 좋겠으니 열심히 살아라. 이 정도? 지금의 저에게는 당장의 생존이 가장 급하고 중요한 문제지만, 2년 후의 저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늘 살까, 내일 죽을까, 의 문제에서 벗어난, 꽤 괜찮은 내가 되어 있었으면 하네요.

 

앞으로 지형 씨에게 남은 시간이 2년밖에 없다고 할 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엄청나게 애쓸 것 같아요. 내 죽음을 마냥 슬퍼하지도 않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지막에는 그 사람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하게요.

 

구독자분들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와 책을 각각 하나씩만 꼽는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게 제일 어려운 질문 같은데요? 함께 읽고 싶은 책은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 함께 보고 싶은 영화는 2007년 개봉작 '안경'입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언급한 책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늘 선물하는 책이에요.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는 걸 정말 잘 보여주는 책이라서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제가 살면서 두 번째로 본 일본 영화예요. 온통 단조로운 분위기의 사람들과 풍경이라서 얼핏 지루하다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따뜻함을 발견하게 되면 구독자분들도 분명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독자분들에게 같이 인사할까요?

지난 이 년간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단순히 제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 끝내지 마시고, 여러분들도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면서 지난 이 년간의 삶을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메일링에 도저히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전적으로 첫 타자인 제 책임입니다. 이 이후로 펼쳐질 이야기들은 훨씬 재미있을 거예요. 그러니 놓지 마시고, 끝까지 함께 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박지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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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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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수

    0
    5 months 전

    지형 씨의 sns를 통해 미지의 담을 알게 되어 오늘 구독했어요. 이 인터뷰에서 지형 씨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평범함이라는 단어 안에 담긴 담백함과 반전들이 제게는 재미있는 요소들로 다가오는데 정말 좋은 메일링 서비스를 만났다고 생각이 돼서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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