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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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살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 약간의 오역 논란이 있는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1856~1950)의 묘비명이다. ‘드디어 더 멍청해지는 것을 멈췄다’(수학자 에르되시, 1913~1996)라는 겸손한 명문도 있고, ‘오늘 당신이 억압하는 목소리보다 우리의 침묵이 더 강력한 날이 올 것입니다’(노동운동가 어거스트 스피스, 1855~1887)라는 외침도 있다. ‘형사 콜롬보’로 친숙한 피터 포크(1927~2011)의 영화 ‘그리핀과 피닉스’(1976)에서 언젠가 자신의 무덤을 찾아올 연인을 위해 ‘안녕? 그리핀,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어요’라고 쓴 것처럼 한 사람만을 위한 것도 있다.
스스로 남겼건 남겨진 이들이 그를 추모하며 썼건, 묘비명은 거기에 묻힌 이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축약한다. 그가 바라본 죽음이 곧 그가 바라본 삶이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는 지가 우리의 삶과 죽음을 규정한다.
‘드디어 자유를 얻었음에 감사드립니다’(마틴 루서 킹, 1929~1968)에서 삶은 소명이고 안식은 보상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내게 행한 일이고 나는 누구에게도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아랍의 반종교적 철학자 알 마리, 973~1057)라는 글에서 삶은 거북한 것이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천상병의 시구는 삶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내게 있어 삶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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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낙서 자체가 어렵다. 펜을 들면 무언가 그럴듯한 것을 써내야 할 것 같다는 부담이 먼저 찾아온다. 나의 그림 실력이 남들보다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십여년 전부터 그림 낙서는 거의 해본 적이 없고, 최근에는 문장을 끄적이는 일에도 어려움을 느낀다. 처음 스케치북을 선물 받고 아무런 제약 없이 마구잡이로 낙서를 하던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피카소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 40년이 걸렸다고 말한 적 있다. 어떻게 하면 피카소보다는 조금 빨리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낙서를 오로지 즐거움만으로 할 수 있게 될 때, 그 마음은 보다 쉽게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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