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근처 초심이란 이름의 미용실이 있는데, 웬 초심? 유치·민망해 금세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그곳 원장 주인의 이름이 '초심'이었어요. 초심이란 두 자는,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어진 게 아닐까요. 코로나와 함께하던 1일을 돌아봤어요. 일상의 sense of wonder, 당신의 쓸모는 잘 살고 있나요. 21년 1월 18일의 기록.
코로나가 시작하고 1년 여, 어떻게 지내시나요? 금방(?) 끝날 줄 알았지만 흉흉한 바이러스와의 생활은 어느새 벚꽃 날리던 봄날도, 찌는 더위에 바다를 거닐던 여름도, 선선한 바람에 책장을 기웃거리던 가을과 이불 속에 두 발을 뻗고 귤을 까먹던 겨울도 조금은 내것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와의 365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코로나. 어떻게 지내시나요? | |
세상은 갑자기 멈춰선 것도 같고, 매일같이 뉴스는 깜깜하기만 하지만, 그 막연함에 세상은 혹시 지금과 뒤를 보며 걸어가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도 됩니다. 텅 빈 시간이 너무 많아서일까요. 첫번째 레터를 띄우며, 그 시작의 걸음을 내딛으며, 제가 만난 지금 이 시절의 한 문장을 소개할까 합니다. D&Department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켄메이 씨의 이야기입니다. |
뉴욕 타임즈에 소개된 록다운 후 거리의 풍경, 우리가 너와 나의 마음을 바라보게 된 어느 날
보지 못했던 느림, 새로운 느림. 조금 낭만이지 않나요? 코로나 시절엔 나름의 스피드가 필요한 걸까요. 현실은, 느지막히 일어나 뒤늦은 아침을 해결한 오전은 금새 사라지고 없곤 하지만요. 😅
오늘의 이야기 주제 _자판기 와 (편의점 비닐 봉투) |
얼마 전 도쿄에선 '블루보틀' 자판기가 등장해 조금 화제가 됐습니다. '블루보틀'이라면,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돼 커피의 3rd wave를 주도하는 커피인데, 국내에선 성수동에 매장이 오픈해 긴 줄을 서게했던 브랜드이기도 한데, 그 dope한 블루보틀이 고작 자판기에 입점을 했습니다. 물론 이건 우리와 달리 자판기 시장 규모가 압도적인 역사와 규모를 잃지 않고있는 일본이기에 가능한 사정이기도 한데요, 자판기 도입을 기획한 담당자는 '부가가치'란 말을 이야기합니다.
네. 블루보틀 자판기를 가져온 건 일본의 대규모 부동산 기업 '미츠이 리테일'입니다. 자판기가 세워진 건 시부야 주택가 한 주차장의 어느 구석이고요. 요즘은 웬만하면 편의점, 이제는 새벽배송에, 온갖 논스톱 구매가 가능하게 되면서, 캔음료 하나 사먹기 위해 자판기를 떠올릴 일은 없다 생각하지만요, 어떤 쓸모없(있)는 자판기는 도시의 틈새 자리, 빈 구석을 채워줍니다. 잉여가치, 그리고 부가가치가 태어나는 '방정식'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예는, 지난 여름 무렵 도쿄의 스미다쿠에서 열린 '무코지마 EXPO'에서 소개된 아티스트 사마타 카즈키의 '구매하면 행복해지는 자동판매기'가 있습니다. 워딩 자체가 심상치 않죠. 근데 이건 아트,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스미다쿠 무코지마 지역의 '노기시타 軒下', 처마 밑을 활용하는 아트 프로젝트 작품의 한 예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실험적 작품인 거죠. 자판기가 판매하는 건 오직 '물'이었고, 서로 다른 이름의 똑같은 물들이 24종이나 자판기 창에 진열되었습니다.
작가는 표현과 감각 사이, 우리의 뇌가 표현에 반응하는 작용을 통해 선입견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렇게 '본질'에 한 걸음 다가가려 했던 것 같아요. 한켠, 코로나로 힘든 지금, 그 아래 보이지 않는, 혹은 잊고있는 진실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니가 자판기를 새삼 돌아보는, 이상한 시절의 메시지처럼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자판기가 설치된 건 보통 갑작스런 비를 피하는 걸 제외하면 별 쓸모가 없어보이는 지붕 아래, 처마 밑입니다. 블루보틀이 주차장에서 찾아낸 '잉여 공간'의 또 다른 예라고 할까요. '무코지마 엑스포'는, 현재 도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도심의 재생 프롤젝트의 일환이이기도 하고, 어차피 아트일 뿐이지만 힌트는 종종, 브래드피트가 마신 10만엔 짜리 물처럼, 현실 속 도발에 숨어있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 시점의 초점을 바꾸어 보는 일. 이와이 슌지의 영화 제목을 가져오면 '불꽃놀이 아래서 보는 게 아니라, 옆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전환. 아트를 삶으로 이어가는 시도는, 이미 여기저기 심심찮게 지속되고 있으니까요.(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추후에)
그리고 본격적으로 코로나를 대처하는 아날로그, 자판기의 활약들을 살펴볼까요. 먼저 일본의 자판기 업계는 우리나라 보다 굉장히 광범위하고, 아직 죽지 않은 시장입니다. 물론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일본 내 자판기 2천 여 만개 중 약 80만 개를 보유하고 있는 코카콜라 재팬은 전체 매출 중 자판기에서의 수익이 30%에 달하기도 합니다. 사무실을 방문하면 하나둘 쯤은 보이는 자판기, 동네 구석 누가 언제 사먹는지 아리송기만한 자판기, 하지만 때로는 종종 'sold out' 빨간불이 켜져있기도 하고, 우리에겐 구(旧)물의 추억이 되어버린 듯한 자판기.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하지만 존재하는 틈새 시장에서 자판기가 움직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경유하지 않는다는 태생적 이점에서 코로나를 대처하는 시도들이 하나둘 선보여지고 있습니다.
코카콜라 재팬과 함께 일본의 자판기 시장을 움직이고 있는 곳 중 하나로 '다이도(Dydo)'가 있습니다. 50년대 창업 후 커피를 중심으로 캔음료 사업을 지속적으로 꾸려가고 있는 브랜드인데요, 다이도는 지난 가을, 다이도가 '발로 터치하는', 접촉을 일체 하지 않고도 구매가 가능한 하향식, 비접촉형 자판기를 공개했습니다. 먹고싶은 음료를 고르는 '터치', 돈을 투입하는 주화구에서의 '터치', 그리고 음료를 꺼낼 때의 '터치', 자판기가 요구하는 모두 세 번의 '터치'를 발과 전자 결제 시스템으로 대체하며 손 한 번 대지 않고 음료 한 잔을 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조금 구차한, 구닥다리 시대 발상같은 느낌은 들지만요, 저는 이런 게 어쩌면 자판기 본연의 방식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일종의 아날로그的 실천이랄까요. 소설가 정지돈 씨와 서평가 금정연 씨가 대화로 엮은 '문학의 기쁨'에 적혀있던 '경이감, sense of wonder'에 대한 말도 떠올랐고요.
좀 표현이 험악하죠? 하지만 요는 일상의 당연한 것들은 사실 경이로움의 결절(結晶)이기도 하고, 우린 그걸 너무 모른척 살고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우린 우리의 발을 우린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런 경이적인 응용, 변주의 이야기랄까요. 코로나는 자꾸 우리의 삶(어제)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물론, 일본의 자판기 시장은 엄연히 사양산업입니다. 한국보다 몇 배의 규모라 하더라도 자판기 업계는 점점 수축하고 있는 업계이고, 피크를 찍던 90년대에 비하면 시장 규모도 30% 이상 빠졌습니다. 테이크아웃 커피가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편의점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각종 캠페인의 '1+1'류의 상술로 어필하면서, 굳이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살 이유(필요)는 점점 자리를 잃고 있는거죠. 저의 경우도, 일본에 가면 페트병 녹차에 뭐라도 하나 걸린 걸 먼저 고르거든요. 그리고 코로나 이후, 자택 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사무실(에 설치된 자판기에서의) 매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자판기의 수익 구조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발표된 한 조사에 의하면 지난 3월과 4월 일본 내 자판기 매출은 전년 대비 34%, 그리고 37% 극감했다고도 해요.
하지만 자판기에서 '음료수'가 아닌 OO를 산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코로나로 휘청이는 경제 전체의 시장에서가 아니라, 자판기를 주인공으로 그 나름의 시스템 속에서, 자판기 내부에 작동하는 원리를 바탕으로 지금의 사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물론 종종 '세상엔 이런 자판기도' 식으로 보도되던 컵라면 자판기랄지, 별나 취향의 자판기들이 여럿 있었지만, 보다 지속 가능한 소비의 플랫폼, ver 2.0정도의 자판기요. 일본에서, 자판기의 진화 여지는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매개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점. 실제로 올해 들어 AI 기능을 탑재한 700대를 포함 더 많은 자판기를 확충한 코카콜라 재팬의 대표 카린 드라간은 "자판기가 진화할 여지는 아직 더 남아있다"고 확언하기도 했습니다. 영업 시간 단축으로 가게가 쪼그라들고, 비대면은 점점 일상이 되어가는 가운데, 자판기는 또 하나의 '시장'을 찾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자판기 매출 극감이란 기사가 쏟아져나온지 반년도 되지않아, '산케이 비즈'는 '자판기 대국 일본 전기를 맞다'는 제목의 기사를 싫었거든요.
자판기를 새삼, 다시 한번 정리해볼게요. 작은 스페이스에서 구현가능하다는 것, 내용물은 뭐든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24시간 365일 연중 무휴이고, 무엇보다 자동(음료) 판매기가 아니라는 것. 근래엔 간단한 식사가 될 만한 오니기리, 벤토(도시락), 수프나 죽 등을 구비한 자판기도 속속 설치되고 있고, 어쩌다 필수품이 되어버린 마스크를 판매하는 자동판매기도 등장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전혀 새롭지 않은, 쓸모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자판기'의, 보지 못한, 모르고 있던 '쓸모'가 오늘의 빈 구멍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런 잠재 가치, 그리고 생활의 재발견. 나아가 경이감. 어제 확인한 뉴스엔 기저귀 브랜드도 자판기 판매를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음료수 판매기가 아닌 '무언가의 판매/구매를 대행해주는 기계.' 자판기의 시작, 그 얼개에 담겨있던 마음은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지난 여름 한 호르몬(곱창) 가게의 '말만 자판기'의 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화 투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감사합니다'란 말이 들려오고, 1분 정도 기다리면 테이크아웃 용 호르몬을 (사람이) 건네주는 방식이네요. 말이 자동판매기지, 이건 자동판매기를 빙자한(?), 수동식 자판기 방식의 판매를 하는 호르몬 가게나 마찬가지네요. 좀 웃기기는 하지만, 전 자판기의 본질, 좀 거창하지만 그 시스템의 쓸모, 활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도 같다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 '마음'이 전해졌거든요. 멀리서 찾지 말고 정답은 가까운 곳, 이미 우리가 아는 곳에 있다는, 등하불명식의 깨달음도 떠올랐고요. 이런 식의 응용, 변주라면 웬만한 일상은 자판기만으로도 가능할 것도 같단 생각도 들어요.😅 우리가 해쉬태그를 달고 집에서 바깥 생활을 만끽한 것처럼(그 만큼은 분명 아니겠지만), 나름의 대안적 삶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소박한 낙관의 희망이랄까요.
그리고, 일본에선 근래 자판기 섭스크립션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도 해요. 섭스크립션의 핵심을 저는 일상, 그리고 지속성이라고 느끼는데요. 넷플릭스 보는 '1달'이랄지, 하루 한 잔 커피를 구매하는 '4주'같은 건, 정신없는 일상에서 '안심할 수 있는 일상'을 보장해주는 최소한의 마지노선같은 생각이 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시간을)를 위한 안전 장치같은 거죠. 아무튼, 지난 여름부터 시작한 JR동일본의 '하루 한캔' 정기 구독 서비스, everypass는 호응에 힘입어 벌써 세 번째 회원을 모집중이에요. 두 개의 플랜으로 매일 한 종류의 음료를 구매할 수 있는 내용이고요, 자판기 중심 음료 판매 기업 accure가 역을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이 '자판기 정기권'이 좀 의미 심장해요. 대부분 지하철 역사 내에 설치되고 있고,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everypass이 기간 한정으로 발행했던 회원권이 pasmo, suica 일본의 지하철 정기권 카드처럼 생겼었거든요. 일상 그 곁의 자판기, 뭐 그런 그림처럼요.
자판기와 자판기. 아는 자판기와 모르는 자판기. 지금 일본에서 펼쳐지는 자판기와 관련된 '움직임'은, 아마 이 보이지 않는 '차이'에 있는 것 같아요. 코로나는 다 나쁘지만 종종 덜 나쁘다고 느껴질 때가 있기도 하고, 익숙한 것 사이에서 낯선 것, 새로운 장면을 마주하게 하는, 깨우치게 하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자판기에서 모르던 자판기를 발견하게 되는 날을, '코로나!!' 한복판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참 아이러니하고 얄궂고 묘하고...하지만 조금은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뭐, 그런 인생이기도 하고, 조금은 거창하게 지금의 '답답함'을 해석하려 하기도 하네요.
그리고 전 코카콜라 사장님이 하신 '아직 남아있는 진화의 여지'란 말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요. 근래 아날로그를 그리던 맘들이 사실 지나간, 하지만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쓸모를 암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그러니까 우리가 괜히 추억팔이를 하고 있던 게 아니라는, 어떤 운명적 과장의 해석의 맥락에서요. 😆 '아쉬움의 존재 이유', '우리가 소소함을 떠올렸던 날들', 그리고 '새롭지 않은 모든 것들의 재발견' 같은 걸, 바다 건너 자판기를 보며 생각했어요. 당신의 쓸모는 지금 잘 살고있나요?
그리움에 잠겨, 추억의 어제를 떠올리는 건 유행처럼 흘러가지만, 어떤 아날로그의 마음은 이렇게 또 한번의 오늘에 남아, 내일의 '삶'이 됩니다. 우리가 이쑤시개에서 '간이 접촉'의 숨겨진 기능을 발견했던 것처럼, 녹이 슨 자판기가 AI의 옷을 입고 코로나 비상 사태의 구원 투수로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요. 아날로그를 품고 사는 삶, 그건 때로 포스트 코로나는 살아가는 날이기도 합니다.
'야마테센의 뉴스 배달부' 첫 번째 이야기, 어떠셨나요? 코로나와의 일상은 깝깝하게 느껴지기만 하지만, 어쩌면 보지 못한 어제의, 아날로그의 내일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엄마가 내려놓으신 생강차를 곁에 두고 되새겨보았습니다. 혹독한 겨울 속 밤거리의 가로등처럼, 어제를 돌아보는 여유를 잃지않는 하루를 응원합니다. ☕️
▶︎ 다음 에피소드는 그들의 비닐봉지와 ⍺에 대하여.
🎼 그리고 오늘의 bgm은, yonawo의 'ijo'를 들어보아요. 후쿠오카 출신, 눈오는(쌓인) 밤에 그럴싸한 4인조 밴드입니다.
🙇♂️ 저의 내부의 어떤 오류로 예고된 발행 시간을 지키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메일은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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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ishdong
앞으로 소식 기대됩니다. 잘읽었습니다.
야마테센의 뉴스 배달부
coolishdong님, 구독 감사드려요.😀 '人'사이트의 이야기, 계속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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