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1 무화과를 키우며

2021.09.07 | 조회 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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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별 것 없는 이야기인 [일희일비]를 구독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첫 운을 어떤 말들로 떼볼까 생각하면서 집안을 한바퀴 둘러보는데,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단단히 열린 무화과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화과의 역사를 되짚는 일도, 또, 동시에 무언가에 대해 실로 오랜만에 '쓴다'는 것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오늘은 가장 몽글몽글한 나에 대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무화과는 여전히 잘, 자라나고 있습니다.

 

지난 봄, 빈 화분을 채워줄 과실수들을 찾다가 우연히 무화과 나무를 발견했다. 내 삶, 특히나 소비에 있어서의 내가 늘 그렇듯 무화과 나무와의 만남도 충동적인 편에 속했다. 나는 준비되지 않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 지 몰랐지만, 어찌됐든 무화과 열매가 맺히는 그 순간을 상상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 달큼한 상상 이후엔 도저히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됐든 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무화과가 열릴 시기나 방법, 과정 등을 머릿속에서 계산해보는 대신, 그저 좋아하는 향수 속 여름내음이나 맛있게 한 입 베어무는 무화과 빵의 향긋한 식감을 상상하며 소비하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준비대지 않은 채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처럼 처음부터 너르게 벌어진 채 시작된 우리의 동거는, 예상처럼 순탄치 않았다. 인터넷에 무화과 나무 키우기를 열심히 검색해 봐도, 해가 드는 창가에서 조금 어두운 곳으로 옮겨줘봐도, 무화과 나무의 잎은 점점 말라갈 뿐이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 피어올랐던 상상 속의 무화과 향도 이파리들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이제 내가 공들여 상상했던 이 무화과는, 그저 평범하게 시들어가는 슬픈 식물들 중 하나로 변해있었다. 나는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보는 대신, 이젠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혼자 선언해 버린 채였다.


그러나 이렇게 슬픈 ‘구매 흑역사’로 남을 뻔 했던 무화과와의 만남은, 애인의 훈수와 개입으로 극적 반전을 맞았다. 그는 늘 그렇듯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포기해버리는 나를 나긋한 말투로 꾸짖었다. 정말 모든 걸 다 해본게 맞냐고, 늘 홀로 비어있는 집은 뜨겁고 건조한데, 보통 가정집처럼 물을 일주일에 한두번 주어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성급하고 남의 말 잘 안듣기로 유명한 나지만, 생활의 영역에 있어서는 항상 나보다 한참 앞서있는 그이기에, 이 말만큼은 믿어보기로 했다. 조금 입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그날부터 나는 매일 시든 무화과 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결론은 ‘죽은 나무에 물을 줘봐야 소용 없었다’는 식의 ‘내가 맞았다!! 이거봐라!!!’ 였을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며칠 뒤부터 갈색 대 위에 초록색 움이 트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장, 두 장의 잎이었지만, 매일 조금씩 물을 주다보니 어느새 풍성한 잎들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전, 내 꿈처럼 흩어져버린 줄 알았던 꿈 속의 그 무화과가 성긴 잎들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 무화과를 본 사람처럼 달뜨면서도, 동시에 부끄럽고 슬프기도 했다. 꿈 속에서 만났던 그 ‘열매들’과는 영영 이별일거라고 쉽게 단정한 내가, 새삼 참 가볍고 쉬워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산다는 것은 시든듯 한 현실에 끊임없이 물을 주는 일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원하던 모양이 아니라고, 이미 나는 희망이라 일컫는 모든 시기를 지나와버렸다고 단정짓고 관심을 거둔다면 그 어떤 모양의 무언가도 될 수 없음을 깨닫는 일. 그리고 지금의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내 한계 안에서만 상상하지 않고, 내 마음을 열어 기꺼이 상처받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내어보이며 조언을 구하고, 또 나아가야 하는 일. 그리하여, 결국엔 내가 상상했던 무언가가 될 수 없더라도, 그 끝에서 어떤 결론을 얻어야만 하는 일.


오늘도 조금은 더 자라난 무화과를 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 삶에서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걸까? 어쩌면 내 주변 많은 친구들이 해주었던 내 삶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가능성을 스스로 틀어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생각한 이상향이 아니라고, 그저 이 삶은 그냥 그렇게 지나갈 거라고 결론내려버린 것은 아닐까?


한참 꼬리를 물어도 답이 없을 질문들을 던지다 문득 다시 한 번 아직 익지 않은 무화과에 코를 대본다. 향수 속의 농밀함은 아니어도, 설탕과 함께 졸여진 달큼함은 아니어도, 내가 시간과 관심을 들여 그와 함께 이뤄낸 이 결말에선 어쩐지 향긋한 삶의 냄새가 났다. 나도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떼를 쓰는 대신 매일 조금씩 물을 주며 함께 커갈 수 있기를. 내 삶의 향기는, 그리하여 바로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영글어 내는 묵직함이기를 빌며.


여전히 무화과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여전히 무화과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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