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2 나의 넷플릭스 하이틴 막장 연대기

2021.09.07 | 조회 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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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오늘은 뭘 쓸까 고민하는 일은 실로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일은, 어쩌면 잊고 있던 나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는 가장 '드라마'적인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설레고 즐거운 마음 덕에 처음 글보다 조금 '덜 사색적'이고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저다운 글이 나왔습니다. 저는 종종 제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꿈꿉니다. 조금 창피하지만, 오늘 이 글을 여기에 툭, 놓고 가는 이유는 바로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덕밍아웃(?)'을 기다리며, 부디 두 번째 글이 퍽퍽한 일상에 조그마한 '피식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편성PD로 10년째 일하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당신이 '무엇을 보는가'는 생각보다 당신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준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10대임에도 대체로 여자 40대가 선호하는 일일/통속극 위주로 미디어 소비를 하기도 하고, 반대로 TV콘텐츠를 소비하지 않기로 악명높은(?) 남자 20대임에도 <나혼자산다>류의 관찰예능 VOD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나이나 성별, 지역이나 학력 등등의 변인보다 어쩌면 '무엇을 주로 보는지'가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는게 10년간 일하면서 경험해온 나의 결론이다. 

  하지만 일종의 직업병처럼 다른 사람들이 어떤 콘텐츠를 보는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살다보니, 정작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선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일 때문에 거의 모든 국내 콘텐츠를 (반강제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게 내가 진짜 좋아서 보는건지 혹은 별로지만 일이니까 참고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건지 헛갈릴 때도 있다. (이래서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게 하나도 없다. 그걸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희미해지다가 결국 좋아하는 게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일 핑계를 대지 않고 즐겨보는 콘텐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억보단 데이터에 의존해 결정해야 하는 편성PD 답게(?) 넷플릭스를 열고 지금 보고 있는, 혹은 보아왔던 콘텐츠들을 훑어보니, 내 취향을 단 한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건바로...

  "하이틴 막장 드라마 취향"

넷플릭스 <엘리트들> 티저 중 /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예고(네이버) 
넷플릭스 <엘리트들> 티저 중 /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예고(네이버) 


  하이틴이면 하이틴이고 막장이면 막장일 것이지, 도대체 하이틴 막장드라마란 무엇인가? 예를 들자면 이런거다. <글리>류의 밝고 교훈적이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건전한(?) 10대의 스토리가 아닌, 일단 파티중에 누가 죽거나 죽기 직전의 상황에 놓이면서 시작하는 <엘리트들>이라거나, 학생들의 sns와 신상정보를 해킹해 그들의 마약중독,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등을 폭로하다 서로 죽이는 <ctrl+z>같은 드라마들 말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건 그저 이상한(?) 취향의 드라마 한두개를 봤던 것 뿐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하이틴 막장 드라마가 팬덤을 지닌 일종의 장르(?) 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아직 많다. 일단 기승전 '성'으로 귀결되는 고등학생들의 성담론을 유쾌하고 야하게(?) 그린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를 필두로, 발레학교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사랑, 그리고 질투와 살인 등 다양한 막장(?)요소를 결합한 <사랑하는 작고 예쁜 것들>, 막장이라고 치부하기엔 높은 완성도로 인종차별, 성소수자, 가족관계 등 10대들의 고민을 초점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스캄> 시리즈까지, 한두개 드라마라고 치부하기엔 수많은(?) 하이틴 막장물들이 이미 넷플릭스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영로열스> / 출처 넷플릭스 사용화면
넷플릭스 <영로열스> / 출처 넷플릭스 사용화면

 


  그렇다면 이 하이틴 막장류들의 차별화된 매력은 무엇일까? 

  첫째, 하이틴 막장 드라마들의 일탈은 때로 성인 범죄물의 그것과 닮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깨닫고 성장하며 나아가는 인물을 그린다는 점이다. 성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의 경우 '막장성'을 위해 끝없이 악한 캐릭터와 그에 반하는 세상 갑갑한(?) 인물들이 이야기의 두 축으로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10대라는 시간적 제약과 고등학교라는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하이틴 막장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에게는 '다시 시작할 기회'라는 특권이 자연스레 주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극적 특성으로 인해 하이틴 막장 속 인물들에게는 선과 악 두가지 면이 공존하는 일이 자연스레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들은 때론 절친의 뒤통수를 치고 그들의 애인과 바람을 피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누군가를 더 큰 수렁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 안에서 '나쁜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양심과 가치관이라는 무게중심으로 인해 점차 '자기만의 균형'과 '용서'의 장으로 자연스레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비현실성을 전제로 한 여타 성인용 막장드라마와 하이틴 막장 드라마를 차별화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정제되지 않은' 시기를 보내는 이들을 통해 각 사회가 가진 고민을 '날 것'으로 꺼내어 볼 수 있다. 성인이 주연인 드라마의 경우 인종/종교/성적지향/성별 갈등을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거나, PC를 지키기 위해 일정 수위 이상을 넘지 않도록 조율하는 반면, 하이틴 막장드라마의 경우 아직 사회화가 완료되지 않은 인물들을 통해 날것의 차별과 혐오를 보여준다. 그리고 사회화되어 감추어지지 않은 이 날것의 차별과 혐오로 인한 갈등은 그저 '면전에 대고 차별하진 않는다'는 정도의 사회적 가면을 갖추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서사 속에서 이들을 내 친구로, 내 주변인이자 가족으로 만들기 위해 부딪히며 결국 그들을 내 이웃으로 '소화'한 채 졸업하게 만든다. 모든 차별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우리는 때때로 이 차별을 표면적으로 덮는 데만 급급하지만, 결국 차별을 이겨내는 힘은 누군가를 '상상 속 악마'에서 내 곁에 함께 있는 '친구'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갈등은 결국 더 큰 화합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드라마보다 하이틴 막장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교훈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하이틴 막장 드라마는 자극적이다. 쓸데없는 베드신부터 시작해 마약, 폭력, 때론 살인미수까지 다양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한다. 어쩌면 너무 많은 콘텐츠를 보느라 엥간한 건 시시해져버린(?) 직업병이 나를 이 하이틴 막장드라마의 세계로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항상 펜트하우스보다 지옥불이기도, 부부의 세계보다 난장판이기도 하지 않은가? 어쩌면 막장계의 가장 현실적인(?) 막장은 하이틴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부르짖으며 나의 부끄럽지만 즐거운 취미생활 커밍아웃(?)은 여기서 마치고자 한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의 넷플릭스 계정엔 어떤 드라마가 담겨있는가? 

  MBTI보다 더 정확한 당신의 마음 속 이야기는 어쩌면 그 몇줄의 목록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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