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편의 인생

멀티버스에서 살아갈 수 없는 유니버스 동료들에게

2022.12.14 | 조회 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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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랜만이야!

보내준 크리스마스 편지 잘 읽었어. 받는 이가 다른 글들이 묶여 있으니까 내 꺼는 어디 있나~’ 하며 선물 꾸러미를 뒤지는 기분으로 스크롤을 내렸어. 그리고 진로를 고민 중인나에게 선물한 <두 인생을 살아봐>를 발견했지.

사실 진로를 고민 중인이라는 수식어가 꽤 새삼스러웠어. 굳이 말로 꺼내는 게 머쓱할 만큼 14살 때부터 줄곧, 아주 지겹게 진로 고민 중이기 때문에 ㅎㅎㅎ... 이젠 진로 고민이 삶의 핵심이 되어버린 듯해. 그럼 그 지난했던 고민의 결론은 무엇이었냐. 여기에 대한 답변은 영원히 유보 상태이겠으나 중간 결과를 낸다면 다음과 같아.

무언가를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무언가를 하자.

내가 원하는 건 단일한 결말이 아니라 다채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 떠나는 것을 반복하며 평생 나아갈 길을 고민할 것 같아. 그저 지금의 오만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뭘 하고 살면 좋을까라는 나의 동어 반복은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지금 우리가 딱 한 편의 인생만 살다 갈 수 있기 때문일 거야. 만약 우리가 수만 가지 버전의 나를 경험할 수 있는 멀티버스 속에 산다면 진로 고민 따위는 의미를 잃을 테니! 하지만 유니버스가 아주 번거롭고 골치 아프더라도 삶의 생동감은 그 유한함과 단일함에서 온다고 생각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에올)> 세계관에 있었다면, 나는 아마 허무에 빠져 타버린 베이글 속으로 갔을 듯....:)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허무의 베이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허무의 베이글

<두 인생을 살아봐><에에올>만큼 다채로운 멀티버스 세계관은 아니지만, 두 가지 버전으로 펼쳐지는 주인공 나탈리의 인생을 보여줘. 바로 임신한 나탈리와 임신하지 않은 나탈리.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 LA 애니메이터라는 꿈을 펼치려던 나탈리의 삶이 임신 여부에 따라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 거야. 임신한 나탈리는 텍사스 본가에 머물고, 임신하지 않은 나탈리는 계획대로 친구와 함께 LA로 향해. 사실 원치 않은 임신이었기에 나는 나탈리가 임신중절을 택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나탈리는 꽤나 확신 있게 출산을 결심했어.

나탈리의 두 인생을 지켜보며 우리 삶에 있어 임신/출신/육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육아와 커리어를 동시에 이어나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여건들이 필요한지 다시금 떠올렸어. 나탈리에겐 헌신적으로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함께하는 부모님, 아이 아빠인 가베, 머물 수 있는 집이 있었고 지지를 보내는 친구 카라와 본인의 빛나는 재능이 있었지. 이렇듯 행운에 가까운 여건들로 인해 나탈리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힘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 

다행이지. 하지만 한편으론 출산으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경력단절을 겪는 수많은 이들이 떠올랐어.

“언니는 왜 ‘프리’를 선언당했나”[플랫] 경향신문 https://m.khan.co.kr/article/202003261645001

이 기사엔 배우 유정민 씨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한 후 선배로부터 경력 잘 쌓아가고 있었는데 임신을 하면 어떻게 해!”라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어. 실상 공연업계 종사 여성들이 출산 후 3~10년간 경력단절을 겪는다고 하니 일면 이해가 되는 반응이지. 하지만 임신은 계속해서 온전히 축하받지 못하는, 이전의 커리어와 일상을 중단시키거나 끝내버릴까 봐 우려되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배우 유정민 씨는 이렇게 말해. “저에게 연기는 제 자신이에요 ... 이 정체성을 사회적인 장애물 때문에 스스로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해요

나탈리는 밤에도 눈을 똘망똘망 뜨고 있는 아이를 보고 올빼미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애니메이터로서 성취를 이뤄내. 이렇듯 출산이 단절이 아닌, 이전 삶에 섞여 들어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분기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이 그저 개인의 행운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 해.

사실 어렸을 땐 단 하나의 사건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가 되든 꿈꾸던 ‘LA의 애니메이터가 되든 그것이 마치 인생의 엔딩인 것처럼.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니 무엇이 되고난 후에도 일상은 이어지고, 여러 명칭들이 쌓여서 내가 되는 거더라고. <두 인생을 살아봐>에서도 어떤 버전의 삶을 살아가든 결국 인생은 자잘한 일상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어. 어떤 날엔 기쁨이, 어떤 날엔 좌절이 있는. 매일을 쌓아나가야 한 편의 인생이 만들어진다는 점이 참 쉽지 않지만, 하나의 일로 인생이 결정지어지지 않는다는 데에서 차분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마음을 얻어.

요샌 여행처럼 왔다가는 인생이라는 오래된 말이 위안이 돼. 여행지에서는 내가 곧 이곳을 떠날 것을 알기에 여기저기 열심히 다녀보게 되잖아. 이처럼 인생도 딱 한 편이니까 이것저것 둘러보며 유한한 여정을 즐기며 살고 싶어. 우리가 두 인생을 살 수는 없으니, 후회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여행처럼 주변을 살필 여유를 잃지 않기를, 그리고 어디로든 길은 이어져 있음을 잊지 않기를! 내년에 우리는 또 어디에 가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마무리할게. 안녕 :)

From.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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