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편지 답장을 하자면, 나도 현실을 피하고자 영화를 본 경험이 많아. 영화관에 앉아있는 두 시간만큼은 스크린 속 세상에서 무한한 안정감을 느껴 장르가 공포일지라도.
그리고 네가 면접 얘기를 꺼내서 생각난 건데, 난 면접 볼 때마다 정유미가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정장 입고 면접 보는 장면이 떠오르더라. 단정히 갖춰 입고 저 깊은 곳부터 목소리를 짜내는 거 말이야. 문득 그런 내 모습이 느끼할 때가 있는데 '어! 나 좀 영화 주인공 같다'라고 생각하며 웃고 넘겨. 이런 상상이 나름 내면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집 오는 길에 버스라도 타면 난리나, 양쪽에 이어폰 꽂고 그 감정을 만끽해. 지금 듣는 재생 목록이 오늘을 담은 단편의 사운드트랙이라 생각하며.
그래서 준비했어. 이번 메일의 사운드트랙!
한때 라디오 PD를 꿈꾸던 나에게 선곡의 기회가 주어지다니. 괜스레 떨리지만 자신 있게 링크를 첨부할게. 노래가 끝나기 전 글이 먼저 끝날까 조금 두려워. 그럼에도 이 목록을 통해 종일 음악이 맴돌길 바랄게.
사연 1.
우리 엄마는 고등학생 때 덕선이처럼 이문세의 별밤 라디오 애쳥자였대. 어찌나 행복한 기억이셨는지, 나한테도 라디오 좀 들으라며 주입식 교육을 시작했어. 난 곧장 손바닥 만한 전자사전을 펴고 당시 덕질하던 오빠들의 라디오를 챙겨 들었는데, 엄마 나 잘했지?
주입식 교육의 효과일까. '이.문.세' 세 글자가 눈에 띌 때마다 뭐라도 예매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지... 항상 결제 창에서 망설였지만 이번엔 효도! 제대로 하고 왔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그리고 이문세 콘서트로 이어지는 완벽한 덕질 코스를 훑고 왔거든.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잊지 못할 경험이었어. 난 음악을 들을 때마다, 부족한 나의 상상력에 탄식하며 시각적인 무언가를 요했거든. 그런데 뮤지컬 영화를 보고 콘서트에 가니 그 모든 감각이 충족된 것 같아.
사연 2.
유난히 엄마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사실 내 문화생활의 뿌리는 엄마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옛날 노래, 옛날 영화에 푹 빠진 것도 '주말의 명화'를 즐기던 엄마의 영향 탓이지. 머리가 클수록 내 취향은 다양해졌지만 아마 다 곁가지일 거야. 여전히 엄마가 골라주는 영화가 제일 재밌거든 (약간 마마걸 같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도 엄마가 골랐어. 예고편에 이문세 메들리가 나오는데 어찌 안 가리요. 그렇다고 내가 끌려간 건 아니야, 나도 전주를 듣자마자 설레었어. 그리고 슬쩍 예상했지, 영화 보며 울겠구나!
주인공과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고, 그때 그 시절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어찌 안 울겠어. 난 엄마가 어느 장면에서 우는지 곁눈질로 살필 계획이었거든. 근데 나도 같이 우느라 바빴어. 뮤지컬 영화만 보면 벅차서 우는 사람들 있잖아. 그게 나거든... 장르적인 이유를 배제해도 '엄마의 젊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 때문에 가슴이 찌릿거렸어. '모든 걸 희생한 우리 엄마'를 주제로 하는 신파극은 많았지만, 그들이 주체가 되어 즐길 수 있는 영화는 못 본 거 같거든. 뻔하디뻔한 내용이더라도 엄마가 즐기는 걸 보니 모든 게 용서되더라.
※ 잠시 공개할게 엄마가 눈물 흘린 그 가사 ※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시간을 되돌릴 순 없나요 조금만 늦춰줄 순 없나요
눈부신 그 시절 나의 지난날이 그리워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나온 '알 수 없는 인생'의 가사. 이 가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내용이야. 역시 삶과 닿아있는 음악은 영원토록 가슴 속에 활활 살아있어.
사연 3.
영화의 여운이 가시기 전, 그 주말에 우린 잔디마당 콘서트에 갔어. 영화와 음악이 연계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됐지. 노을 진 하늘을 보며 함께 '그대와 영원히'를 흥얼거리기도 했어. 알고 보니 엄마도 나도 이 곡이 최애 곡이더라고. '저 붉은 바다 해 끝까지 그대와 함께 가리 이 세상이 변한다 해도 나의 사랑 그대와 영원히' 해가 끝내 꿀꺽 사라지는 순간마다 듣고 싶은 노래야. 한편으론 극적이라, 드라마 배경 음악으로 깔고 싶다 생각했어. 이문세의 노래가 대부분 그런 것 같아. 그랬으니 수도 없이 OST가 되다 못해 영화가 탄생한 거겠지.
더욱이 콘서트에서도 모든 가사와 글을 꼭꼭 씹어 넘기게 되더라. DJ를 오래 하셨던 분이라 모든 멘트가 담담한 편지 같았어. 나도 언젠가 따뜻한 구어체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난 아마 콘서트에서 본 엄마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거야. 벅차다 못해 애정어린 눈으로 손잡고 노래했거든. 알 수 없는 인생 그리고 붉은 노을을 부를 땐 함께 일어나 뛰기까지. 영화 엔딩 크레딧 이후 쿠키영상이 있다면 이 순간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영영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지만 벌써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버렸는데, 기록하니 생생히 살아나는 느낌이야.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리는 하루가 되길 바라며...
추신. 종로에 남아있던 서울극장의 마지막 모습이 궁금하다면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러 가!
From.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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