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욕심 많은 예술가가 독점권을 사들인 탓에, 아무나 쓸 수 없는 검디 검은 색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현대에는 이렇게 어떤 색을 소수의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과거에는 종종 있는 일이었습니다. 딱히 금지하지 않아도 그 색깔을 낼 수 있는 재료가 워낙 희귀하여 소수의 특권 계층만 사용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울트라마린'은 청금석이라는 보석에서 추출하기 때문에 말그대로 금값이었습니다. 워낙 귀해서 옛날에는 성모 마리아의 옷을 채색할 때에나 겨우 썼습니다. 1826년부터 이 색을 합성해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진짜 울트라마린을 사용하려면 킬로그램 당 1,500만 원은 줘야 한다고 합니다.
보라색도 그런 귀한 색 중 하나입니다. '황제의 보라색(Imperial purple)'이라고도 불리던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을 기원 전에 만들어내기 위해선 '뮤렉스(Murex)'라고 불리는 지중해 고둥을 부숴서 채취해야 했습니다. 고둥 1만 마리로부터 겨우 1.4g 정도 채취된다고 하니 얼마나 얻기 힘든 색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기원 전 1100년 무렵부터 공장식으로 티리언 퍼플을 생산해 왔음이 유적을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라색은 재료의 희소성이 아니더라도 다른 색과는 뚜렷하게 다른 점이 있는 특이한 색입니다. 보라색은 어떤 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색입니다.
아래 그림은 빛의 스펙트럼을 나타냅니다. 빛의 파장에 따라 빨간색부터 바이올렛(보통 보라색으로 번역하지만, 이 글에서는 Purple과의 구분을 위해 Purple은 보라색, Violet은 바이올렛으로 이름하겠습니다.)까지의 색상들이 나타납니다.
이 스펙트럼을 둥글게 말아서 원형으로 표시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색들이 그라데이션으로 부드럽게 연결되지만 양쪽 끝이 만나는 곳, 즉 빨강과 바이올렛 사이에는 그라데이션 영역이 없어 뚝 끊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보는 색상환은 끊기는 곳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이올렛과 빨강 사이에는 보라색이 자연스럽게 채워집니다. 이 보라색은 아까 선 스펙트럼에서는 없던 색상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답은 뇌에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스펙트럼에 존재하지도 않는 빨간색과 바이올렛 사이의 보라색을 인지합니다.
인간의 원뿔세포는 3가지 종류가 있어 각각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을 감지합니다. 세 종류의 세포가 각각 얼마만큼 자극 받았는지에 따라 우리는 그 빛이 스펙트럼의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을 동시에 자극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 모순된 상황에서 인간의 뇌는 이 빛을 스펙트럼에는 없는 보라색으로 만들어 인지합니다.
인간은 결국 보는 만큼 보고 듣는 만큼 듣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이라도 있을 수 있고 내가 본 것이라도 없을 수 있습니다. '내가 봤다'라는 가장 믿음직한 근거조차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영화 '콘클라베'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확신은 가장 큰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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