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일자가 무슨 요일인지는 해마다 달라집니다. 어떤 해의 어린이날은 월요일일 수도, 어떤 해에는 화요일일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가끔은 기대하지 않았던 연휴가 생겨 행복해지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현재 저희가 쓰고 있는 역법이 대단히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외계 문명을 만난다면 저희의 달력을 소개할 때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어떤 달은 31일, 어떤 달은 30일, 심지어 어떤 달은 28일인데 가끔은 29일이고, 큰달과 작은달이 정확히 반복해서 오는 것도 아니며, '넷째 주 수요일'이라고 하면 그게 며칠인지 도저히 모르겠고, '7월 31일에 만나자'라고 하면 그게 무슨 요일인지 도저히 모르겠는, 온갖 불편함 투성이의 달력입니다. 저를 세계 대통령으로 뽑아 주신다면 반드시 역법 고치고 겸사겸사 야드파운드법도 역사 속으로 묻어 버리겠습니다.
구독자 님은 제 얘기를 듣고 '그렇다고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나'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이미 몇몇 사람들이 생각해 둔 괜찮은 제안들이 있습니다.
'국제고정력'은 1902년 영국의 회계사 모지스 코츠워스가 제안한 역법으로, 6월(June)과 7월(July) 사이에 'Sol'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달을 삽입해 1년을 13개월로 나눕니다. 이렇게 하면 각 달은 28일, 정확히 4주로 구성됩니다. 매월 1일은 일요일, 2일은 월요일, 3일은 화요일, 하는 식으로 모든 일자와 요일이 고정됩니다. 이렇게 13달을 구성하면 총 364일로 하루가 남게 되는데, 이 하루는 13월 29일로 넣고 '세계일'이라는 특별한 날로 지정해 어느 요일에도 속하지 않게 했습니다. 4년에 한 번은 윤년으로 6월 29일을 추가하고 역시 세계일로 삼습니다.
13이라는 숫자가 12에 비해 나눗셈에 불리하다 보니 사분기나 반년과 같은 단위 계산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세계력'은 1930년 미국인 엘리자베스 아켈리스가 제안한 역법으로 분기 계산이 어렵다는 국제고정력의 단점을 개선한 역법입니다. 1년을 4개월씩 3분기로 나누어 각 분기의 첫 달은 31일, 나머지 달은 30일로 구성했습니다. 국제고정력처럼 1년의 마지막 날은 세계일이고 윤년에는 6월 말에 세계일을 하루 더 추가합니다. 국제고정력처럼 한 달짜리 달력으로 평생 쓸 순 없지만, 한 분기짜리 달력으로 평생 쓸 수 있어 충분히 유용합니다.
1973년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제안한 '세계계절력'은 더욱 칼 같습니다. 여기엔 애초에 '달'이라는 개념이 없고 네 개의 계절만 있습니다. 계절의 이름은 A, B, C, D이고, 각 계절은 총 13주(91일)로 구성됩니다. 날짜는 'A-34', 'C-72'와 같이 계절과 그 계절에서 몇 번째 날인지의 조합으로 표기됩니다. 역시 하루가 남기 때문에 이 날은 'D-92'로 추가하고 'Year day'라고 하는 어떤 요일에도 속하지 않는 날로 지정합니다. 윤년에는 'B-92'를 추가합니다.
국제고정력, 세계력, 세계계절력을 사용할 경우 날짜와 요일의 관계가 항상 고정되어 있어 어떤 날이 무슨 요일인지 즉시 알 수 있고, 기념일이나 공휴일이 항상 같은 요일에 오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기 쉽습니다. 이 세 역법의 경우 해마다 달력을 새로 찍어내고 사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단점을 찾자면 종교계의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7일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종교의 경우, 세계요일이 낀 주에는 한 주가 8일이 되어 난감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국제고정력과 세계력에선 매달 13일이 금요일이 되어 미신적으로 안 좋을 수 있다는 염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각 역법의 제창자들이 한 주의 시작을 일요일로 잡아서 그렇고, 페퍼노트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국제 표준에 맞춰 월요일로 한 주를 시작한다면 매달 13일이 토요일이 되어 간단하게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이 역법들이 도입되지 못한 가장 큰 문제는 '익숙하지 않다'라는 점입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프랑스공화력'이라는 새로운 역법을 밀어붙여본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공화력은 앞서 소개한 역법들보다 한 술 더 떠 10일을 한 주로 하여, 우리가 흔하게 쓰는 10진법과의 통합을 꾀한 역법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밀어붙인 미터법이 현재까지 주류로 이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무게, 길이 등의 경우 장사꾼들이 단위를 가지고 장난치던 일이 많아 표준도량형의 도입이 대중의 지지를 받은 반면, 시간으로 사기를 치던 경우는 드물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괜히 기존과 달라 불편함만 야기한다는 의견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역법 뿐만 아니라 하루를 10시간, 1시간을 100분, 1분을 100초로 고쳐 보려고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세계력의 경우에는 1954년 UN에서 도입을 진지하게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56년 4월 UN 상임이사회에서 부결했고, 더 이상 세계력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편 국제고정력을 응용해 화성 진출 시 사용할 달력이 미리 제시된 바 있습니다. 1985년 토마스 강게일이 자신의 아들 이름을 따 명명한 다리우스력은 화성의 공전 주기에 맞춰 설계된 달력입니다. 화성의 1년은 약 668.6 화성일로, 다리우스력은 1년을 24개월로 나누고 각 달을 28일(4주)로 설정했습니다. 24×28=672일이 되어 실제보다 4일이 많기 때문에, 6개월마다 한 달의 마지막 날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조정합니다. 국제고정력은 세계요일이 추가 되지만 다리우스력에서는 토요일이 한 번씩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달력 역시 국제고정력처럼 모든 달력이 직사각형 형태로 통일되고, 같은 날짜는 항상 같은 요일이 되는 장점을 가집니다. 화성에서는 지구와 달리 전통적인 달력 체계가 없기 때문에, 백지 상태에서 이러한 합리적인 달력을 도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랑스 공화정부도, UN도 실패한 개혁을 제가 세계 대통령으로 뽑혀 밀어붙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니, 화성 개척 시에는 인류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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