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호주에 있는 매니저가 팀미팅에서 '이제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으니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회의를 하자'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사전에서 출장이나 해외여행은 사라질 줄 알았거든요. 코로나가 잠잠해져도 그로부터 1~2년 후에나 여행을 고려할 거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습니다. 호주가 해외입국자의 격리를 면제하고 문호를 열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3월 초만 해도 한국은 해외에 다녀오면 7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했는데, 면제할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를 보고 출장 일정을 확정했습니다. 3월 21일부터는 무증상이면서 예방접종을 완료하고, PCR 음성확인서를 제출하면 자가격리가 면제되었습니다. 단, 입국 후 1일 이내에 PCR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출국을 위한 비자, 백신 접종 증명서 발급, 코로나 19 검사 영문 결과지, 디지털 승객 신고서 (DPD, Digital Passenger Declaration)와 호주의 상황은 어떤지, 그리고 입국을 위해 PCR 검사, Q-CODE 입력 등 준비하고 찾아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조사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정리했으니 필요한 분은 참고하세요) 이 모든 수고로움에도 가장 두려웠던 건 '출국 전 혹시라도 코로나에 걸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주변에 코로나 확진자가 넘쳐나서 '코로나 걸리면 인싸, 안 걸리면 앗싸'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요. 3월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한 이후로는 거의 '앗싸'처럼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열심히 지켰습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나갔다 건강하게 다녀왔습니다.
출장은 저에게 유일한 일탈입니다. 한때 비행기에서 꼼짝 못 하고 밥 먹고 영화 보는 게 힘들다 생각했다가, 즐기기로 마음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맙더군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걸 즐기는 유일한 시간이니까요.
덕분에 《오두막》,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완독했습니다. 《오두막》은 종교적 색채가 짙지만 진정한 용서와 삶을 대하는 태도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천천히 누리며 사는 삶을 그려낸 《숲속의 자본주의자》는 제가 원하는 삶을 그렸기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책은 평소에도 시간을 내어 읽지만, 영화는 큰 맘먹고 보는 편입니다. 강요한 휴식의 시간으로 '보이스', '조제' 영화를 봤습니다. '보이스'를 보고 보이스 피싱을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경각심이 커졌고, '조제'로 안타깝고 아름다우며 짠한 로맨스를 지켜봤습니다.
별로 맛없는 기내식을 먹으면서도 코로나 동안 기내식이 그리워 인터넷에서 사 먹는 사람이 있다는 기사를 떠올리며 감사히 먹었습니다. 해외로 이동하지 않고 국내 상공에만 돌다가 기내식 먹고 착륙하는 패키지가 2~3일 만에 완판되었다던 기사도 생각났어요. 항공사 사이트에 방문해서 금액까지 확인했더랬죠. 그만큼 여행이 고팠습니다.
출장이 마냥 즐거운 게 아닌 것이 낮에는 출장지에서의 일을, 밤에는 한국에서 온 메일을 확인해야 하는 중노동이기 때문입니다. 3일 미팅 동안 잠시 5분 정도 화장실 다녀올 시간을 가지는 것 외에 8시간 초집중해서 참여했습니다. 영어로 회의를 하니 더욱 힘듭니다. 매일 저녁 동료와 함께 식사했는데 6시부터 시작해서 9시에 끝났기에 호텔에 오면 밤 11시나 12시까지 한국에서 온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입니다.
종일 영어가 오가는 내용을 집중해서 듣고, 말하고, 결정해야 했고, 저녁 늦게까지 일하니 꿀잠을 잘 수밖에 없었네요. 업무적인 미팅이야 어떻게든 영어로 말하고 듣는다고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은 제 이야기를 영어로 편하게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시끄러운 식당에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영어 스몰톡(small talk) 하기란 정말 어려워요. '영어가 모국어로 쓰지 않는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맞나?'라는 약간의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늘 겪는 일이기에 이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스스로 칭찬하며 극복했습니다.
5년 전에 딸과 함께 멜버른에 3박 4일 휴가를 다녀온 기억이 났습니다. 이틀은 여행사 일일투어로 그레이트 오션로드와 필립 아일랜드 펭귄 섬을 방문했습니다. 하루는 멜버른 도심에서 공원도 가고 카페투어도 했어요.
딸이 호시어 레인(Hosier Lain, 미사거리)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구글맵에 즐겨찾기를 하고 갔다가 짧은 거리에 실망했던 기억도 났습니다. 구글맵을 작동하니 제가 묵은 호텔과 아주 가깝더군요. 여전히 예전처럼 짧은 거리인데 딸과의 추억은 길게 느껴졌습니다. 다시 만나 반가웠고 구글맵에 감사했어요.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던 해외여행을 이리 갑작스레 다녀오니 당황스러우면서 반가웠습니다. 때로는 선물같이 다가오는 이벤트가 바로 행복이 아닌가 싶네요. 첫 해외 출장을 다녀온 기억이 났습니다. 라스베이거스와 하와이에서 휴식과 같은 보상 출장을 다녀왔는데요. 그때 마음속으로 '퇴사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더랬죠. 국내회사에서는 출장의 기회가 많지 않았거든요.
코로나 전에는 출장을 자주 다녔습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며 누리는 혜택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다가 코로나 덕분에 다시 깨달았습니다. 승진, 급여, 복리 후생 등 비교하고 따질수록 불평불만이 늘어만가는 어수선한 상황에 잠시 일탈의 기회를 가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는 것을요. 퇴사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예전보다 욕심이 늘어나서 아직은 더 일하고 싶으니까요.
코로나 덕분에(?)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여행의 소중함을, 출장의 감사함을, 그리고 딸과의 추억을 떠올린 한 주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당연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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