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녕! 오랜만에 시네필(?) 모드 장착하고 돌아온 N이야. 간만에 머리 부여잡고 영화를 봤거든. 요즘 머리 굴리기 싫은 맘에 가볍고 통통 튀는 영화만 봤었는데, 갑자기 과제 하듯 영화 보려니 힘들긴 하더라. 주로 외국 영화를 볼 때 겪는 일이지. 여기서 외국이라 하면 할리우드 영화 말고 그 외 국가들! 독일이나 중국, 프랑스, 브라질 등등. 이국적인 이미지와 낯선 사회를 담은 내용까지. 매 장면 새로움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는 영화들 말이야.
난 영화 수업을 들으면서 이국적인 영화를 접할 일이 많았어. 이국적이고도 오래된 영화들,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런 영화들. 그중 머릿속에 잔상이 오래 남은 영화는 단연 독일 영화라 말할 수 있어. 보는 내내 '와 이 화면은 대체 뭐지?, 약간 힙한 것 같기도 하고...'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야. 조금은 기묘할 때도 있어서 악몽을 꾼 적도 있어. <칼리가리의 밀실>과 <노스페라투> 발표 준비를 할 때였는데, 기하학적이고도 차가운 공간에 갇혀 빙빙 돌다가 드라큘라의 원형 노스페라투를 마주하는 꿈이었어. 이 당시 뱀파이어는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 컬렌처럼 반짝반짝 빛나지 않아. 오히려 쥐의 형상과 비슷하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 궁금하다면, 용감하게 노스페라투를 검색해봐)
당시엔 수업 때문에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봤다만, 지금 돌이켜 보니 이 수업 덕분에 나의 시야가 참 넓어졌어. 수업이 없었다면 평생 접하지 못했을 영화들. 얼마나 귀한지 몰라.
2.
이쯤에서 오늘 이야기할 영화를 알려줄게. 처음은 익숙한 맛으로 준비해봤어. 바로 멜로 드라마! 모두가 잘 알고 또 좋아하는 장르지
영화 제목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974년 영화야. 이 정도면 양호하지? 30~40년대 영화를 들고 올까 하다가... 조금은 현대적인 영화로 골라봤어. 이 영화의 감독은 '뉴 저먼 시네마의 심장'이라 불리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독특한 이미지로 보여주는 감독이지. 주로 제도화된 차별이나 폭력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었는데, 멜로드라마 장르도 예외는 없어. 그는 단순히 사랑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무책임한 결론 대신 현실적인 결말을 던져주거든. 나처럼 로맨틱~ 코미디~ 외치는 사람들에겐 비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진정한 현실 아닐까 싶어. 그는 사람들 사이 관계에서 피어나는 감정과 그로 인한 착취적 관계에서 사랑 또한 예외가 아니라고 이야기했거든. 어렵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멜로 측면에서 보자면, 독일 여인 에미와 아랍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알리의 사랑(?) 이야기야. 운명적인 러브 스토리 기저에 그들이 겪어온 편견과 소외의 고통이 담겨있지만...
파스빈더는 이러한 내용을 특이한 방식으로 담아냈어. 굉장히 낯설고 한편으로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미지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지. 이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이야기를 눈으로, 마음으로 다시 보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내. 신기하지. 직접 장면을 본다면, 이해가 더 빠를 거야. 파스빈더의 낯선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자.
위 이미지는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화면이야. 독일인 에미가 외국인 전용 바에 들어가자마자 다들 정지 상태로 뚫어지게 쳐다봐. 약간은 노골적인 시선으로. 마치 스페이스 바를 눌러 캡처한 것처럼 말이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이런 장면은 수도 없이 등장해.
에미가 자식들에게 알리와의 결혼을 알리는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장면. 어둡게 반짝이는 알리의 결혼반지 너머로 정지된 자녀들의 모습. 보는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한참을 멈춰있어. 이들은 외국인 알리를 결코 받아들일 마음이 없거든. 당시 사회 분위기 마냥 딱딱하게 경직되어있어. 저 표정 악몽에서 본 것 같다.
그리고 위 이미지는, 내가 섬네일로 넣은 첫 번째 장면에 뒤이어 나오는 장면이야. 마치 <겟아웃>의 한 장면 같지 않아? 둘은 그저 평범한 데이트를 하러 나와 앉았을 뿐인데. 이대로 멈춰서 뚫어지게 바라봐. 결국 에미는 저들과 같은 시선 때문에 너무 힘겹다며 울고 말지. 이 장면들을 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에미와 알리의 마음이 그대로 전이돼. 그리고 불편한 마음의 이유를 쫓아 생각하게 만들어.
장면 기법 하나로 이리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갑작스럽지만 영화는 참 무궁무진하다. 프레임 속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야.
잠깐 다른 길로 새볼게.
영화 속 정지된 화면을 보다 보니 뉴진스의 뮤직비디오가 생각났거든. 반희수가 아이들을 찍어주는 장면에 등장한 동급생들의 시선. 이 장면 또한 해석이 많던데. 역시 클래식 is 힙. 너는 이 장면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해진다.
3.
이외에도 위 이미지처럼 '감금된 화면'이 불쑥 등장할 때도 있어. 주로 인물들이 갈등이나 편견을 겪을 때, 인물들을 가두는 거야. 정지된 화면만큼이나 가슴이 답답해.
어떨 땐 상황과 맞물려 이 감금 기법의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기도 해. 이 둘은 손님으로 들어와 비싼 음식을 주문함에도 불구하고 웨이터로부터 따가운, 일종의 경멸과도 같은 시선을 받는데. 나까지 함께 저-높은 편견과 차별의 벽 사이에 갇힌 기분이었어.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지라...'라고 변명하기엔 여전히 심각하니까.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마음이 불편한 건 여전한 것 같아. 낯선 이미지에 한 번 충격받고, 아직도 이 내용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충격받고. 과연 나는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나도 모르게 타자화하고 있진 않은가 돌아보게 되더라. 꼭 영화 속 사람들처럼 노골적인 시선으로 쳐다보진 않아도, 무심결에 그들을 감금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
최근에 독일 친구와 discrimination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영화 속 이야기와 맞닿아 있어서 또 고민이 많아지더라고. 고민은 내 영혼을 잠식한다. 하하.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유색 인종을 차별하고 또 순혈 독일인이 아닌 백인들을 차별한다고 해. 아마 알리에게 발음을 못 알아듣겠다며 엉뚱한 제품만 주던 슈퍼마켓 아저씨, 더럽다며 손도 대기 싫어하던 아주머니와 같은 사람들이겠지.
사실 알리라는 이름 자체도 그의 본명을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로 대충 만들어낸 이름이야. 외국인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지. 가끔 나도 해외에서 이름을 말했을 때 이러한 이유로 속상했던 적이 있어. 그들이 정확히 듣고 부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거든. 알리도 아마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었을 거야. 그리곤 포기한 거지. 이 사람들한테 그 정도 '친절 :)'을 바라는 건 무리였을 테니.
이렇듯 영화 속 인물들의 입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대사들만 봐도 알리와 에미가 겪었을 고통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결코 해소되지 않아. 파스빈더의 영화가 그렇듯, 사랑이 궁극적 해결책이 되진 못하거든. 끝내 알리가 스트레스성 위궤양으로 쓰러지는 결말, 그 옆에서 흐느끼는 에미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검은 화면으로 흩어져 나가. 극히 현실적이라 멍-해졌지.
요즘은 온-오프라인의 경계도 불명확하고 국경도 이전보단 연하게 바뀌었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고도화된 차별은 오히려 살갗으로 느끼기 어려우니까. 내가 하하 호호 웃으며 소비하는 무언가가 한국의 알리와 에미에게 고통은 아닐지 곱씹어봐야겠어. 파스빈더 씨 당신은 학부 시절에도 지금도 저에게 많은 과제를 주시는군요. 충실히 과제를 수행해볼게요. L, 구독자 함께하자!
추신. 양심고백, 나 사실...영화를 1.5배속으로 봤어.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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