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올해가 100일이 채 남지 않았어. 갑작스레 날이 쌀쌀해져서 이제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
나는 요새 어디 발 붙일 곳 없나 여기저기 이력서를 찔러보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어. 취준생에겐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가족 같은’ 회사 생활이 참 부럽구려. 너의 편지를 읽고 가족, 유사가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 가좍이란… 언제나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 나에게 가족은 떠나고 싶으면서도 떠나기 싫은 존재야. 이 갑갑함은 우리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에서 오는, 나의 의지가 들어가 있지 않은 채 묶인 공동체라는 점에서 오는 것 같아. 유사 가족은 어느 정도 자의로 형성된 거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혈연 가족은 온전히 타의에 의한 거잖아. 그래서 가족이란 참… 어려운 것 같아.
자기 전,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고자 왓챠를 뒤적거리다 오래전 보고싶어요 표시를 해둔 ‘고! 록스!’를 재생했어.
그냥 갑자기 끌려서 봤는데, 틀자마자 ‘아 이건 너무 좋다’ 싶었어. 주인공은 영국 런던에 사는 15살 록스! 그의 이름 ROCKS가 큼직하게 화면에 뜨고, 영화는 아침의 록스 집으로 향해. 록스, 동생 이매뉴얼, 엄마 풍케 세 식구는 달걀 요리를 해 단란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어. 록스는 엄마와 포옹을 하고 친구를 만나 학교로 향해.
록스는 꽤나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해. 친구들과 프리스타일 랩도 하고 춤도 추고, 공부도 곧잘 하고, 친구 수마야의 조언을 들으며 처음으로 탐폰도 껴보고, 특히 메이크업에 소질이 있어서 돈 받고 친구들에게 화장을 해주기도 해.
학교에서의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록스는 집에 돌아와 돈과 쪽지를 발견해. “나도 노력했지만 머리 좀 식히러 가야겠구나. 둘 다 정말 사랑해. 꼭 돌아올게, 약속이야” 그렇게 집에는 록스와 이매뉴얼 둘만이 남게 돼.
록스는 엄마가 돌아올 거라는 옅은 희망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행동하기도, 불안에 휩싸이기도 해. 엄마의 행방을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록스는 할머니에게 전화해. 그리고 할머니는 다 안다는 듯 “부모라고 다 애를 돌보는 건 아냐”, “여성이라고 전부 모성애가 있는 건 아냐”라는 말을 남겨. 록스는 자신의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고 부정해. 하지만 시간은 지나고, 돈은 떨어져 가고, 전기가 끊길 때 록스의 얼굴엔 불안의 기운이 짙어져 가.
그렇지만 영화는 록스를 혼자 두지 않아. 나는 이 영화에서 록스와 그 주변 인물들을 계속해서 연결시킨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 주변 인물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각자의 방식으로 록스와 이매뉴얼을 도우려고 해. 옆집 아주머니는 아동보호당국에 록스와 이매뉴얼의 상황을 신고하고, 친구 수마야는 자신의 집에 록스가 머물도록 해. 하지만 도움이라는 건 참 미묘하고 어려운 것 같아. 애정이 있더라도 각자의 상황은 너무 다르기에 온전히 상대를 이해할 수도 없고, 도움을 받는 상황이 상처가 되기도 하니까.
록스는 집 앞으로 찾아오는 아동보호당국 직원을 이리저리 피해 다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였을까, 엄마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걸까, 동생과 찢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서였을까. 록스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친구들이었고,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 가장 먼저는 수마야에게 가지. 수마야는 록스를 도우려 하나, 오히려 록스는 평화롭고 따뜻한 집안에서 친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가시를 세워. 서로의 상황이 다르기에, 도움은 삐걱거려.
아, 이쯤에서 록스가 왜 ‘록스’로 불리는지 말해야 할 것 같아. 록스는 수마야가 따돌림을 당할 때마다 나서서 막아줬는데, 그때 록스의 목소리가 우렁차서 ‘록스’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해. 록스 집에 붙어있던 경구 ‘Real queens fix each other's crowns(진정한 여왕은 서로의 왕관을 바로잡아 준다)’에 따르면, 록스는 친구의 비뚤어진 왕관을 기꺼이 바로잡아 주는 친구지. 하지만 록스는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해. 우리 머리 위에 왕관이 있다면, 그 왕관이 비뚤어졌는지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내가 아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일 거야. 록스가 부탁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록스에게 손을 뻗어 그의 왕관을 바로잡아 줘. 록스의 친구들도 만만치 않게 용기 있지.
또 영화 곳곳에는 록스와 친구들의 춤과 노래가 들어있어. 불안한 와중에도 록스는 함께 웃고 춤추는 힘을 간직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일상을 이어나가는 웃음을 지켜나가는 힘. 돌이켜보면 그 힘을 청소년 시기엔 더 가지고 있던 것도 같아. 집에서 어떤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친구들을 만나면 웃고 하던 때가 떠올라.
영화의 첫 장면은 해 뜰 무렵, 런던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록스와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이야. 영화의 끝에서도 여전히 그들은 반짝이는 바다 앞에서 평소처럼 웃고 떠들어. 그런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삶을 살아나갈 용기와 힘을 얻은 것 같아. 아무리 힘들어도 비뚤어진 왕관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리얼 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어. 혹 내 왕관이 비뚤어졌을 때 나도 부탁할게!
FROM. L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