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일인생활 / 서른일곱번째 스토리-타인의 용도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고, 상대에게서도 제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면 됩니다.

2021.10.16 | 조회 1.8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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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일인생활 스토리

일상을 주제로 개인적이고 사소한 짧은 글을 매주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보내 드립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를 친구와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작은 인쇄소였던 곳을 개조해 만든 카페였는데, 2층까지 창이 트여 있고 천장이 높아 밝고 시원한 분위기가 꽤 좋았던 곳이었습니다. 둘이서 카페 매니저가 추천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면서 오이를 싫어하는 친구의 샌드위치에서 오이를 빼 먹고 있을 때 친구가 물었습니다.

"근데, 요즘도 틴더 해?"

데리마요 소스가 잔뜩 묻은, 어슷썰기로 썰어진 짭조름한 오이를 입에 물고 친구를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와이프를 한 적이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인 데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시기에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요. 정색하며 펄쩍 뛰는 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친구는 웃으면서 '그럴 거 같아서 물어본 거야'라며 오이가 제거된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전혀 모르는 사람 만나고 싶지 않아? 지금 연락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 앞에 쌓인 휴지보다 적을 거 같은데?"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먹을 때 손이 끈적거리는 게 싫어서 한 입 먹을 때마다 휴지를 찾는 버릇은 정말 고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타인이라고 합니다.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나옵니다. 유사한 단어로는 남, 남남 등이 나오는데 이미 '남'이 된 관계를 강조하는 관용어인 '남남'이라는 단어는 그 관계가 얼마나 싫었으면 같은 말을 붙여 쓸 정도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게다가 '남'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떠 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동으로 입에서 웅얼거리게 되는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도로 남'이라는 가사의 절묘함은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으로 만나 점 하나를 지우는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도로 남이 되는 상황은 노래 가사가 저절로 만들어질 정도로 허망하고 가슴 아픈 일이긴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안 만난다는, 만나더라도 깊은 관계는 절대 만들지 않겠다는 지인의 말도 기억이 납니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아이폰을 열어 저장된 앱들을 살펴봤습니다.
'temp'라는 이름의 폴더 안에는 틴더를 비롯한 몇 개의 데이팅 앱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열어보는 앱도 있고, 이건 대체 뭐지 싶은 앱도 있었죠. 가끔 열어보는 앱도 어떤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거기에 올라와 있는 프로필을 보는 그저 그런 킬링타임용 앱이 된 지 오래입니다. 먼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자기 고민을 다짜고짜 털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고민에 관해 관심을 가진 사람과 컨택이 되고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잘 맞는 포인트를 발견하게 될 거고 그렇게 남으로 만나 점 하나를 지우는 과정이 시작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 역시 저 앱에서 어떤 고민 글에 끌려 대화 몇 마디를 나누다 사귀게 된 경우가 있었네요. 하지만 그간 여러 일이 있었고 한동안은 'temporary'라는 저 폴더명과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같은 동성인 여자를 만나는 입장이다 보니 범죄에 대한 걱정도 없었고, 지금과 달리 여행 등이 자유로울 때였기에 가능했죠.

타인을 만나는 것은 확실히 어떤 매력이 있습니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고, 상대에게서도 제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면 됩니다. 서운한 말 한마디에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할 일도 없고, 어두운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드러난 어떤 일을 에둘러 설명하거나 애써 감출 일도 없습니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기분 좋은 말을 주고받고, 적당히 좋은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는, 적당함으로 가득 채워진 휘발성 시간을 보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 시간에 대한 기억 역시 휘발되어 날아가 버립니다. 이 때문에 타인을 만나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이 어쩌면 존재에 대한 매력보다는 그 시간이 주는 자유로움이 더 큰 매력으로 느껴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타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휘발성 시간이라고는 했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연히 열어 본 데이팅 앱에서 갑자기 결정해서 온 도쿄인데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현지에서 만날 한국인을 찾는 글을 보고 답장을 했고 사진을 주고받은 뒤 다음 날 저녁에 만났습니다. 적당히 부르기 편한 이름을 말해줬고, 직장인입니다 정도의 통성명을 한 거로 기억됩니다. 다른 정보는 물을 이유도, 알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취미가 뭐냐 같은 통상적인 질문이 오갔고 최근에 본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실은…."

영화의 여주인공에 관해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저 말이 나왔고 그때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갑자기 주중에 도쿄에 오게 되었는지,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상대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참는 듯했지만 결국 눈물이 터졌고, 2시간이 다 되었다는 스텝의 노크를 듣고서야 지금 본인이 나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떠 올린 듯했습니다. 자기가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은 저는 다음 날 상대와 헤어지면서 연락처를 지울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더는 연락할 상황이 아닌 상대는 그렇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그 사람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은 이렇게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상대의 이후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걸 원했겠죠. 그래서 상대는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타인인 저에게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난 3월, 이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많은 분께 다양한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반려견에 대한 글에는 함께 지내고 있는 반려견의 사진들을 보낸 분들도 있었고, 파스타 만드는 방법이 있던 글에는 그 방법대로 만든 파스타 사진을 보낸 분도 있었습니다. 짧은 감상의 글을 보내주신 분들도 계셨고, 글을 보며 떠 오른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보내주신 피드백에 전부 답장을 해 드렸는데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보내는 답장이 불필요한 '아는 척'으로 느껴질 수 있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쓴 말이 누군가에겐 쓸데없는 간섭이나 오지랖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피드백에 답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의 메일링 서비스를 받으시는 분들은 저를 아는 분들일 겁니다.
책을 통해 알게 되거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팔로잉하면서 평소 저의 생각이나 일상, 심지어 어떤 분들은 오늘은 뭘 먹었는지, 오늘은 뭘 입었는지, 목소리나 술 마셨을 때의 말투까지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피드백을 주는 분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라고는 메일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된 이메일 주소와 메일의 인사말에 남은 이름뿐입니다. 완벽한 '남'이자 타인이죠. 그래서 저에게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들을 메일로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후를 걱정할 필요 없이, 메일을 전송하고 그 순간이 지나면 그냥 휘발되어버리는 그런 감정이 필요해서.
그리고 아마도 저 역시 메일링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그런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난생처음 만난 데이트 상대로부터, 예상치 못한 사적인 이야기를 들은 저는 상대의 말을 듣기만 했고 짧은 맞장구와 짧은 소견을 말하는 것, 그리고 울고 있는 상대에게 티슈를 접어 내미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위로의 말을 못 해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에 그녀는 '벽이 아닌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살 것 같고, 생판 남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어 준 것만으로도 큰 위로'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타인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그게 바로 타인의 용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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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동안 혹은 한 주 동안 제가 즐겨 들었던 곡들을 모은 플레이리스트입니다.
글을 쓰면서 떠 오른 일들에 엮인 곡들도 있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새롭게 발매 된 신보도 있습니다. 아래 링크된 애플뮤직과 스포티파이, 유튜브를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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