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프랑스 사상자 모리스 리즐링이 말했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
도대체 인생이 뭐길래, 우리를 철학자로 만든단 말인가? 철학을 전공한 동료에게 내가 요즘 철학 공부를 한다고 자랑했다. 직장인의 삶에 그닥 도움도 될 것 같지 않은 철학을, 비전공자가 굳이 일하기도 바쁜 빠듯한 일상에서 공부하니 칭찬좀 해달라는 의도였다. 그만큼 배움에 열정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더했다.
수십 년간 나를 들여다보고 글로 성찰한 결과 내 삶의 동기는 학습이라는 걸 알았다. 뭔가 새롭게 알 수만 있다면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일요일인 오늘도 사내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5시간을 투자해서 이러닝을 듣고 내친김에 시험까지 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오늘 꼭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정보를 살펴보려고 회사 컴퓨터를 켰다가, 이러닝을 들었고, 이러닝 들은 걸 잊지 않으려고 시험까지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고 학습의 늪에 빠졌는데 작년부터 벼르던 일을 집중해서 해치우니 속이 후련했다.
작년 말 일과삶 브런치 구독자 이벤트에 시드니에 계신 분이 당첨되었다. 그는 내 책 《아이 키우며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건》 저자 사인본을 선물로 선택했다. 내가 출장을 자주 다니는 걸 아는 그는 시드니에 오면 책을 달라고 했다. 얼마 전 시드니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에게 연락할까 말까 망설였다. 1년이 지난 일이라 그냥 모른 채 넘어갈지 약속을 지켜야 할지 결정이 어려웠다. 시드니에서 그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연락하고 만났다.
그는 시드니라는 낯선 도시에서 외국인 소수자로 커리어를 시작해서 이제는 확고히 기반을 잡은 직장인, 유연한 교육시스템에서 자녀가 삶을 즐기고 커리어를 도전하도록 격려하는 아버지, 독서와 달리기로 심신을 돌보는 브런치 작가였다. 힘든 과정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사람을 만나 나누는 대화와 상대에게서 배우는 삶의 태도와 경험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학습의 원천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 중국인 동료가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호텔에서 야근하려고 계획했는데, 코로나 전 상하이에서 시드니로 근무지를 옮긴 동료의 삶이 또 궁금하더라.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외향형이라 일 대신 사람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하겠지? 사실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원동력은 학습 욕구다. 책이든, 사람이든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니 만사를 제치고 달려갈 수밖에. 모리스 리즐링이 말한 것처럼 인생이 우리를 철학자로 만든다면, 나는 인생에서 만난 사람과 지식에서 영감을 받고, 글로 정리하며 성찰하는 과정에서 철학자가 된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에 일을 좋아라 한다. 돈 내고도 배우는데 월급 받으며 배우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동료들에게 말한다. 일하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 변화에 적응해 나갈 수 있다. 피터 드러커는 은퇴에 대한 질문에 “죽으면 영원히 쉴 테니, 사는 동안은 은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사는 동안 배우고 싶으니 평생 일하다 죽겠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나의 롤모델인 그는 실제 임종 3개월 전에도 셰익스피어 전권을 꺼내 놓고 다시 읽기 시작했으며, 새로 나올 책을 구상했다. 베르디가 여든 살에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이를 먹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자신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였던 《철학적 수업 시대》에서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강조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반성하여 철학적 깨달음을 얻는 삶은 지적이면서도 유쾌하다. 그러나 이는 충고하기는 쉬워도 자신이 하기는 어려운 인생훈이다. 유능한 상담자는 충고하고 강요하기보다 직접 모범을 보이는 법이다. 가다머는 한 세기가 넘는 긴 삶을 통해 자기 사상을 몸소 실천해 보여 준 철학자였다. -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중에서
백 살이 넘은 나이에도 예비 대학생을 위한 교양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노력을 했다니 가다머는 철학계의 피터 드러커가 아닐까? 누구나 말은 쉽게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피터 드러커 역시 평생 학습을 강조했고 몸소 실천했다. 교육담당자로 나는 평생 배우고 성장하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학습 문화를 만들 것이다. 죽기 직전 은퇴하며 당당히 말할 것이다.
"결국 인생이, 일과 삶이 나를 철학자로 만들었다."
직장인 철학자 시리즈는 이 글로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일주간의 성찰글로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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