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시인의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시 창작 노트라는 부제에 걸맞게 시를 쓰기 위한 26가지 방법을 100여 편의 시와 함께 소개합니다. 시뿐 아니라 글을 쓰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2019년에 이 책을 읽다 매우 독특한 시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 문정희의 시 『응』중에서
살짝 야한 느낌도 있지만 '응'이라는 단어가 눈부시게 다가왔습니다. 50년 이상 시를 써온 문정희 시인의 존재를 그제야 알았습니다.
2020년 TBS TV책방 북소리 300회 신년 특집에 문정희 시인이 출연한다는 정보를 듣고 시청했습니다. 어떤 분인지 궁금했거든요. 시의 느낌처럼 그녀는 열정적이고, 시원시원하고, 힘이 넘쳤습니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시인은 슬픈 나라의 백성입니다. 시인에게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행복'이죠. 갈증, 분노, 허기가 창작의 기본입니다. 시인은 행복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존재입니다."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바라만 보고 그리워하며 갈증과 분노로 가득한 시인의 삶이 안타까웠습니다. 프로그램에서 문정희 시인의 인생책을 부탁했는데, 그녀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그날의 감정으로 선택했습니다. "여성은 모든 생명의 모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딸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젊고 힘이 필요한 여성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합니다. 당당함과 생명의 기쁨, 위대함과 존엄성은 여성에게 내재된 가능성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바로 50년 이상 이어온 시인의 삶을 받친 힘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녀는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며 "쓴다는 것 자체가 힘"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현실은 힘들고 불행하지만 그 안의 분노, 불행, 슬픔이 좋은 재료가 되어 우리 삶을 구원한다고요. 그녀가 추천한 책은 아직 못 읽었고 그녀의 2014년작 시 에세이 《살아 있다는 것은》을 읽었습니다. 시를 감상하며 시에 깔린 배경이나 시인의 감성을 더욱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시 에세이가 좋더군요.
시 쓰기가 "생명의 즙을 짜내어 시간의 그 절대한 힘을 펜촉에 알알이 묻혀서 영혼의 비단을 짜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글에 50년 인생과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지상에 머무는 시간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생명을 가지는 동안 만나는 다른 생명을 한없이 사랑하는 일. 그것은 어떤 신들도 흉내 내기 어려운 인간만의 축복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중에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맞습니다. 그 축복을 온전히 누려야겠습니다. 문정희 시인이 강남에 거주해서인지 몰라도 강남 삼성동에 최근 문정희 시인길이 조성되었습니다. 내친김에 다녀왔습니다. 시와 함께 꽃이 단장되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더군요. 도심 한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딴 길이 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울지, 50년 이상 외길 인생을 치열하게 걸어온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심에 이런 공간이 더 많이 생겨나길, 더 많은 작가가 독자를 위로하고 공감을 자아내는 글을 쓰길, 저 또한 그런 작가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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