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미로를 헤매다 보면 때로는 의외의 장소에서 익숙한 얼굴과 마주치곤 합니다. 김연수 작가와의 첫 만남도 그랬습니다. 《청춘의 문장들》로 처음 만난 줄 알았는데 독서 기록을 보니 2020년에《시절일기》를 읽었더군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줄평으로 '깨어있는 소설가의 깊이 있는 에세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뭔가 울림이 있었나 봅니다. 작가의 청춘, 방황, 성장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장과 시로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소설로 유명한 작가를 산문집으로 먼저 만났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랬습니다. 소설가의 에세이는 마치 작가의 내밀한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들의 창작 과정과 내면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때로는 소설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글로만 만난 김연수 작가가 요조 작가와 함께 북토크를 한다기에 선착순에 밀리지 않게 두근거리며 광클했습니다. 일반적인 북토크가 아닌 새 소설 낭독 북토크라 어떻게 진행할지 궁금했습니다. 새 소설은 2편이었고 조금 긴 소설 '여수는 나의 힘으로'는 김연수 작가가, '7번국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법'은 요조 작가가 낭독했습니다. 독자 낭독도 있었는데 단편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독자가 꼽은 소설 중 일부를 선택했더군요. 낭독 후에는 요조 작가의 예리한 질문과 김연수 작가의 깊이 있는 답변이 오가며, 문학의 세계로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논현문화마루도서관에서 개최한 북토크였는데 강남구민보다 타지에서 온 팬 분들이 훨씬 많은 만큼 인기 작가인데도, 김연수 작가는 무척 겸손했습니다. 일반적인 방식의 북토크가 아니라 소설을 낭독하는 이유가, 소설가는 소설로 말해야 한다는 작가의 신념 때문이라는데요. 왜 우리는 책 이야기를 말로만 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졌을까요? 작가는 글로 말하는 게 맞는 거죠.
낭독을 듣는 것만으로 소설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도서관에서는 출력물을 제공했습니다.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감되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두 소설 모두 공통점이 나다움을 찾고, 지금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네, 가만히 놔둬도 최대한 손해 안 보는 경로를 자동으로 택하는 비행기 같은 거 말이에요. 그거 아세요?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다는 거? 하지만 그 버스에서는 한시도 잠들 수가 없었어요. 방심하다가는 제 몸이 어디에 가서 부딪힐지 알 수 없었거든요. 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순간에만 집중해야만 했지요. 덕분에 저는 제 옆에 누가 탔는지, 그 사람의 가방 속에는 어떤 주전부리가 있는지, 우리가 지나가는 곳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 사는지 알게 됐답니다. 그 뒤로 저는 잠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티켓을 구하는 삶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됐답니다." - '여수는 나의 힘으로' 중에서
경비 때문에 비행기를 못 타고 태국 방콕에서 캄보디아 시엠립까지 가는 버스를 탄 지현의 이야기입니다. 우연히 생긴 사건에서 지현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안간힘을 써서 잠들기 위한 티켓을 구하고 있는데 말이죠. 정신 바짝 차리는 여행을 다녀오면 달라지려나요?
"살면서 꿈이 참 많았다. 처음에는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미뤄둔 일을 꿈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틈엔가 이제는 영영할 수 없게 된 일을 꿈이라고 부르게 됐다. (중략) '지금 이 순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꿈이 된다고. 지레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미뤄둔 모든 일들은 그렇게 영영 꿈으로 남게 된다고." - '7번국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법' 중에서
저마다 꿈의 정의도 다르고, 그 꿈도 다를 겁니다. 지레 안 된다고 생각해 꿈으로 남겨두긴 했겠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시간이 지나면 모두 꿈이 되어버린다고 하니 좀 겁나네요. 지금 할 수 있는 건 빨리해야겠더라고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부터 7번국도를 여행하겠다고 마음먹은 주인공이 25살이 되어서야 행동으로 옮겼으니 꿈이 되어 버린 거네요. 지금 할 수 있으면서도 미뤄둔 하고 싶던 일이 뭔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김연수 작가의 원래 꿈은 천문 연구원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소설가가 되었고, 다행히 소설을 많이 사랑해 주셔서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소설가의 삶을 누린다고 하더군요. 《청춘의 문장들》에서 방황하던 작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매일 아침 다시 고쳐 쓴다고 합니다. 온라인 서점에서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보면 리커버 기념으로 짧은 소설 [7번국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법]을 리플렛 형태로 수록했다는데요. 제가 들은 2023년 7월 23일 새 소설 낭독회 버전과 무엇이 다를지 궁금합니다. 작가의 노력과 꾸준함이 인기 작가의 길로 이끌기도 했겠죠?
소설에서 주는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와 더불어 작가의 작가다운 태도를 지켜보며,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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