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 혈혈단신으로 미국 유학을 하러 간 A는 신문물에 눈이 번쩍 뜨였다. 보이는 것마다 한국에 가져오면 대박 날 사업 아이템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귀국할 때 컨테이너에 책과 자료를 잔뜩 실어 왔다.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마다 아이템을 하나씩 꺼내어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 나갔다. 사업 통찰력과 인재를 알아보는 눈으로 안정적인 중소기업을 일구었다.
하루는 A 사장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성과자를 결정짓는 핵심 역량이 뭔 줄 알아?"
"흠 글쎄요. 전략적 사고, 도전 정신, 창의력 뭐 이런 거 아닌가요?"
"아니, 바로 계기 관리야."
계기 관리 뭔 괴기스러운 용어람. 사전에서 찾아보면 계기는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변화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로 영어로는 chance, opportunity 그러니까 기회와 같은 의미다. 기회라면 좀 밋밋해서 굳이 계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결정적인 기회를 강조하고 싶은 경우겠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고 받아들이는가?'가 직장인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
영업 직원이 마케팅 교육 과정 개발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늘 그렇듯 컨설턴트들은 이미 여러 프로젝트에 문어발처럼 걸쳐서 더 이상 투입할 여력이 안 되었다. 누군가가 맨땅에 헤딩하든 야근하든 고객사에 투입되어 능숙한 컨설턴트처럼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저마다 하는 일이 있고, 일과 삶의 균형을 바라는데 누가 손을 들고 추가적인 일을 떠맡는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새로운 일을 맡든 안 맡든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는데? 해본 적도 없는 일을, 굳이, 왜? 잘해야 고객에게 깨지지 않을 거고, 선방하기도 힘든데 바보인가?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경험해보고 싶어서.
고객사에서 일하느라 출퇴근 시간도 2배로 늘었고, 기존에 하든 일도 하면서 까탈스러운 고객의 요구를 맞추어야 했기에 야근도 잦았다. 서점에 가서 마케팅 관련 책도 왕창 구매하고, 인터넷에서 엄청난 자료를 서칭하고 다운받았다.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의 《마케팅 불변의 법칙》, 《브랜딩 불변의 법칙》, 《포지셔닝》과 필립 코틀러의 《마케팅 원리》를 읽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마케팅의 '마'자도 몰랐는데 1-2개월 만에 마케팅 전공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대리, 과장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는 낯선 프로젝트였지만 동료 컨설턴트와 함께 일하며 조금씩 익숙해졌다.
강의 콘텐츠로만 밋밋하다고 액티비티를 넣어달라는 고객의 요구에 신들린 듯 회사의 공급망과 고객을 이해하는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을 짧은 기간 안에 개발했다. 실제 파일럿을 운영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고객사의 칭찬까지 받았다. 당시 회사에서는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였지만, 나에게는 큰 성취였고 커리어에 힘이 되었다. 그때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을 수정하여 회사 신입사원에게 적용하기도 했고, 이직을 위한 면접에서도 창의력을 증명하는 경험 스토리로 활용했다.
A 사장이 말한 계기 관리는 안주냐 도전이냐 같은 두 갈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동일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은 달라진다. 안주하면 중간이라도 하지만 괜히 도전했다 실패하면 중간도 못 할까 두렵고, 기회비용이 발생하기에 선뜻 나서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귀찮아 피하려 들고, 혹은 받아들여도 억지로 꾸역꾸역 끝을 낸다. 하지만 고성과자는 그것을 계기로 삼아 도전하고 한 단계 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디우가 강조하는 것이 사건이고, 주체이고, 진리입니다. 사건은 지식과 문명에 흠집을 내고, 주체는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사건에 담긴 진리를 드러냅니다. - 《미치게 친절한 철학》 중에서
나는 손을 들어 과정 개발 컨설팅 프로젝트라는 사건에 뛰어들어 마케팅 교육의 지식과 문명에 흠집을 냈다. 나라는 주체는 사건에서 초보자였지만 충실하여 직장인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사업가 마인드라는 마케팅 기본 지식 학습법과 액티비티를 만들었다. 꼭 전문가가 아니어도 도전하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결과는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게 계기가 되어 다른 기회로 연결된다는 게 사건에 담긴 진리였다.
주체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사건에 충실하고 그것을 사랑한다고 바디우는 주장했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이어서 해피엔딩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성공의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고객사가 만족하는 거? 납기 내 일을 마무리하는 거? 내가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민 것만으로 성공이 아닐까? 사건과 주체만 있다면 진리는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을까? 컨설턴트 신분이 아니었기에 프로젝트 과정에서 결과는 두렵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고 성장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일을 사랑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바디우가 외치는 ‘사건에 충실하라. 자신에게 열린 길을 지속하라’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삶은 사건의 연속이고 철학은 그 사건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 《미치게 친절한 철학》 중에서
사건에 충실하는 게 계기 관리가 아닐까? 직장에서도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업무 철학이 그 사건에서 도피할 것인가 아니면 충실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직장인이라는 여러분(주체)은 오늘 어떤 사건(업무)으로 진리를 찾아가는가? 당신의 업무 철학은 무엇인가? 젖은 낙엽 아니면 들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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