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삶] 내 삶에서 빛이 나요

흑백 페이지는 찢어 버리고 컬러 잡지를 들여야 겠어요

2022.12.17 | 조회 1.1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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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삶의 주간 성찰

일하고 배우고 느낀 성찰을 나눕니다

어린 시절 흑백 잡지의 한 페이지로 자리 잡은 기억이 있습니다. 온 가족이 단칸방에 세 들어 살다가 드디어 집을 지어 이사한 날입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던 6살 아이는 이삿짐 가방을 흔들며 경쾌하게 걸어갔습니다. 부모님의 첫 내 집 마련이므로 두 분이 가장 기뻤겠죠. 

당시 방 두 개에 다락방이 있는 신축 집이었지만 4형제인 우리에게는 여전히 좁은 공유 공간이었습니다. 먹고 살긴 힘든 때였기에 수도꼭지에서 찬물만 나오는 건 당연했고, 언제 등장할지 모를 쥐와 바퀴벌레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때까지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걸 보다 놀랬습니다. 심지어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더군요. TV 드라마의 재벌 집에서나 나올 법한 식탁에서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는데, 조기며 갈비가 가득해서 젓가락을 어디로 뻗어야 할지 당황스러웠습니다. 우아한 홈드레스를 입은 친구의 엄마는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또 놀러 오라고 말했지만 부끄러워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죠. 

아마 그때부터 독립을 꿈꿨을 겁니다. 나만의 방이 가장 절실했고, 그다음이 따뜻한 물이었습니다. 집을 넓혀 이사 가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웠으므로 가장 빠르게 얻는 방법은 혼자 서울로 취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집에서 탈출해서 서울의 작은 아파트 단칸방에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문제는 고향 집에 남은 부모님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생애 처음으로 마련한 집에서 40년 넘게 사셨습니다. 여전히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고, 화장실은 밖에 있습니다. 보일러를 작동하지 않아 겨울에는 전기장판에 의존해야 하고 웃풍도 심합니다. 집을 좁혀서라도 깨끗하고 따뜻한 곳으로 이사 가시라고 권했지만 불편하지 않다며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부모님 댁에 가면 늘 퀴퀴한 냄새가 났는데 그게 곰팡내라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복권에 당첨되면 부모님의 두 번째 집을 사드리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룰 수 없는 막연한 꿈이었습니다. 그 불편한 집에서 어머니를 차갑게 보냈습니다.

부모님의 첫 집
부모님의 첫 집

홀로 남은 아버지는 드디어 이사를 결정하셨습니다. 새롭게 이사한 아버지 집에 2박 3일 동안 다녀왔습니다. 오래된 집이지만 화장실이 실내에 있고, 따뜻한 물도 나옵니다. 보일러도 잘 작동하고 마당에 작은 공간도 있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주변 건물 때문에 집으로 햇볕이 들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한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운 느낌이 들었어요. 아침에만 운동을 다녀오고 종일 집에만 계실 아버지가 걱정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집도 넓고 편의시설이 가까워서 만족스러워하셨지만요.

고향에서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정겨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3일 만에 집에 오니 환한 햇살이 저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낮에 햇볕을 쬐어야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촉진된다는데요. 나만의 방, 따뜻한 물이 충족된 후 가장 필요한 게 햇살이었습니다. 재택근무 덕분에 누리는 호사입니다. 남으로 향한 큰 창 덕분에 초록이들과 함께 저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이 따뜻함을 저만 누리고 아버지께 보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문득  글이 빛나는 게 아니라 내 삶이 빛난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집이 있고, 독립적인 활동이 가능하고, 한낮에는 햇살 가득 온기를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흑백 페이지는 찢어 버리고 초록빛으로 가득한 컬러 잡지를 들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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