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이별하고 싶어서

훔쳐 읽던 시집을 손에 넣은 가을 저녁

2022.09.22 | 조회 44 |
0
|

문장과장면들

책이라는 결과보다 아름답고 치열한 여정을 나눕니다.

늘 훔쳐 읽던 시집을 오늘에서야 샀다. 나에게 책은 훔치듯 읽는 것과 공공연하게 찾아서 읽는 것, 생각하지 못하게 선물 받아서 들춰보지 않을 수도 없고 단숨에 읽히지도 않는 것이 있다. 책을 읽는 모양과 태도가 달라지는 순간은 오직 마음에 있다. 책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 천천히 펼쳐 읽기 시작했을 때의 마음. 아무 기대 없이 펼쳤던 책이 매일 같이 들여다보는 거울 속에서 결코 보이지 않던 나의 심연을 툭 건들기 시작하면 그 책인 십중팔구 훔쳐 읽는 책이 된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책을 팔 안쪽에 펼쳐두고서 비밀스럽게 넘겨 읽는 것, 이 비밀스러운 독서는 숨기고 싶은 동시에 언제라도 들키고 싶은 것이 된다.

어떻게든 이별.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신춘문예 등단을 한 시인이 18년간 침묵을 지키다 펴낸 첫 번째 시집, 그다음으로 낸 시집의 이름은 지난가을, 내 눈과 손을 사로잡았다. 만난 적도 없이 이별하고 싶던 방랑자의 마음을 포획한 두께감이 조금 있는 파란색 시집을 만난 곳은 책과 술을 파는 연남동의 작은 가게였다. 유독 연남동에서 볼 일이 많았던 지난가을에 늦은 시간까지 몸 둘 곳을 찾던 중에 들어선 곳이었다. 술은 마시지 않아도 책과 어두운 구석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공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질 때면 슬슬 마실을 나가듯 작은 골목 구석에 위치한 그늘을 찾았다. 손이 닿는 곳마다 책이 있어도 마음이 가는 책이 없어 하루에도 수 권의 책을 더듬다 돌아오곤 했던 나에게 ‘어떻게든 이별’이라는 단호하고도 서글픈 제목의 시집은 유일한 정착지였다.

멤버십 구독자만 읽을 수 있어요

가입하시려면 아래를 클릭해주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2 문장과장면들

책이라는 결과보다 아름답고 치열한 여정을 나눕니다.

 에서 나만의 뉴스레터 시작하기

자주 묻는 질문 / 문의하기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 070-8065-4275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