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작가 니키 펠레에즈가 그린 <가짜 눈물>은 텅 빈 눈을 한 여자가 흘리는 가짜 눈물을 묘사한 작품이다.
낯선 여자
말간 얼굴을 한 여자가 길을 막아섰다. 늘씬하게 키가 큰 여자는 피부가 유난히 하얬다. 새카만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스물의 여자가 있다면 바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여자가 왜 나를 붙드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당차게 붙드는 사람들은 대개 목적이 같았다. 거절의 대답마저 삼킨 채 그냥 돌아설 참이었다.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여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한 번 돌아서면 절대로 붙잡히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거짓말은 단 한 마디도 새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선량한 입술이었다. 착하게 생긴 입에서 꼭 착한 말만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연한 얼굴로 내가 짐작하는 말을 내뱉을지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한번 말해보시지. 너도 결국 같은 소리를 할 거지?’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를 붙든 여자는 입을 닫았다. 꾹 닫힌 그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키 작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먹잇감을 제대로 찾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여자의 입에서 많은 말이 흘러나왔다. 둘은 한패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회유하듯 세 치 혀로 나를 꼬드겼다. 세상에는 정말 중요한 게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고 한탄했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특히 영이 맑아서 나한테 자연스럽게 이끌린 거라고도 했다. 전혀 솔깃하지 않았다. 꼭 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슬쩍 압박했지만, ‘또, 헛소리!’라고 혼자 마음속으로 외쳤다. 여자는 어떤 말로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도를 믿습니까
“관심 없습니다.” 긴 이야기를 듣고 짧은 답을 건넸다. ‘도를 믿습니까?!’라며 다가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소리를 했다. 그들을 밀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응답이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는 척 앞만 보고 걸어가면 금세 시큰둥해졌다. 나도 모르게 반응을 보였다면 되도록 건조하게 굴며 신속하게 멀어져야 했다. 이도 저도 통하지 않을 만큼 집요한 사람도 있긴 했다. 언젠가 학교 정문에서 만난 남자는 집 앞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집 앞 모퉁이까지 따라온 남자를 떼어내기 위해 어디선가 주워들은 어려운 영어단어와 한국어를 섞어 마구 말을 내뱉었다. 무슨 뜻인지 해석하기 위해 남자가 주춤하는 사이 냅다 골목 안으로 내달렸다.
내가 아는 방법은 이 정도였다. 반응하지 않기, 의도치 않게 반응을 보였다면 되도록 신속하게 자리를 피하기, 상대가 지나치게 집요하게 굴면 오히려 미친 사람처럼 굴며 떼어내기. 대부분 이 정도면 얼마든지 해결됐다. 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한참 붙들려 있는 친구를 구해준 적이 있을 만큼 그들의 수법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2인 1조로 움직이는 여자들의 패턴은 낯설었다. 작업은 총 두 단계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먼저, 키 큰 여자의 역할은 순진한 얼굴로 행인을 불러세우는 것이었다. 행인이 발걸음을 멈추면 그제야 멀찍이 서 있던 두 번째 여자가 다가와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실패했다. 나는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들을 따라가 내 영이 얼마나 맑은지 알아볼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돌아서려는 찰나, 키 큰 여자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흔들리는 내 마음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여자는 한참 동안 닫고 있었던 입을 다시 열었다. 새빨간 입술 사이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안타까워서 그래요.” 여자가 내뱉은 단어들이 끈덕지게 내 가슴에 들러붙었다. 여자는 인파가 쏟아지는 삼성역 한복판에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붙들었다. 진심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내뱉는 말이 옳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힐끔힐끔 우리를 곁눈질했다. 눈물 흘리는 여자, 달래는 여자, 어쩔 줄 모르는 여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세 여자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이토록 많은 눈길을 받아내며 울먹이는 여자가 뻔히 거짓말인 걸 알면서 나를 속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는 말이 틀린 줄도 모른 채 나를 구원하겠다는 진심을 걸고 있는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순간의 감상에 사로잡힌 나는 그녀의 눈물이 진심으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위험한 공감
여자의 눈물에 나는 공감했다. 이름도 모르는, 생전 처음 본 그 여자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안타까워서 눈물이 난다는 그 여자의 마음이 나를 흔들었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단호한 거절의 말을 물렀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택시에 올라탔다. 답십리의 허름한 주택에서 나는 그들이 약속한 세계를 보았다. 나의 영을 구원하고 안온을 약속하는 세계. 허름한 마당을 지나 군데군데 창호지가 떨어져 나간 낡은 문을 여니 하얀 소복을 입고 줄지어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눈물도 가짜일 때가 있다는 걸 몰랐던 내가 새삼 한심했다. 멍한 눈을 하고 하염없이 제사를 지낼 차례만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왔다. 지하철역에서 말간 얼굴로 눈물을 흘렸던 여자는 나를 외면했다. 그녀에게 나는 구원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닌 그저 탈탈 털어 벗겨 먹을 먹잇감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그들의 마음을 흔들 차례. 눈물로 그들의 공감을 얻을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그런 작전쯤은 금세 눈치챌 게 뻔했다. 나는 여전히 공감하는 척 굴었다. 그들이 보여준 세계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척 애써 태평하게 굴었다. 약속이 있으니 다음에 다시 날짜를 잡고 만나자고 유혹했다. 다음번에는 얼마든지 긴 시간을 내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답십리로 가는 택시에서 미리 놓아둔 덫이 빛을 발했다. 택시에서 부러 큰 소리로 전화를 걸어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가는지, 언제쯤 헤어질지 여러 사람에게 일러둔 터였다.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지 않으면 누군가 신고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당을 지키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삐걱거리는 음침한 대문을 열어주었다. 골목은 어두웠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나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내달렸다. 어쩌면 영영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대문 밖으로 나왔다는 안도감과 낯선 골목에 내려앉은 어둠이 주는 공포가 마구 뒤엉켰다. 가로등이 환한 큰길에 다다라서야 나의 헛된 공감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실감했다. 공감은 곧 교감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마음. 공감이 제 역할을 하려면 공감할 상대가 진짜여야 한다. 진실하지 않은, 진심이 없는 사람을 향한 공감은 한없이 위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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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현정
제법 긴 시간 경제/경영 서적을 번역해 왔다. 책을 좋아해 공부도 내팽개치고 독서에 빠져 살던 학창 시절, 한 여성의 인생 여정을 그린 소설 <조개줍는 아이들>을 읽고 번역가의 꿈을 키웠다.
책이 좋아서 마흔 권이 넘는 책을 번역하고 나니, 이제 내 글도 쓸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과 세상을 향한 관심을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 브런치,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오래오래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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