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삶]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연결이 되더라

직장인 철학자

2022.11.05 | 조회 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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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삶의 주간 성찰

일하고 배우고 느낀 성찰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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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적성과 전혀 상관없는 프로그램 개발자의 삶을 우연히 선택했다. 아니 그 전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이과를 선택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수학을 좋아했고 뭐든 딱딱 결과가 떨어지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나는 이과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글마저 딱딱한 논리로 가득하지 않은가? 대학 4년 내내 미적분, 물리학, 무기화학 등 숫자와 논리로 가득한 이성의 세계를 맴돌았다.

기초지식 때문일지 몰라도 나름 개발을 잘했고 디버깅도 제법 능숙했다. 매뉴얼을 살피며 꼼꼼하게 파고들어서 동료 프로그램의 오류까지 찾아줬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문가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주니어 개발자였다. 고수 개발자를 경쟁 상대로 여기며 따라잡으려 했으나 넘지 못할 산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개발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직무라는 핑계를 대며 다른 길을 모색했다.

완전히 새로운 직무를 맡기는 어려우니 IT 엔지니어 분야 안에서 다양한 업무에 도전했다. 서버 프로그램 개발, 클라이언트 프로그램 개발, 사내 IT 관리, 개발 PM(프로젝트 매니저)을 거치며 맛보기 여행을 다녔다. 그 어느 곳도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모바일 쿠폰을 다운받아 마트에서 보여주면 할인받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당시 모바일 쿠폰은 핫한 아이디어였지만 쿠폰 이미지 하나 다운받는데 1분 이상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카카오 먹통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몰려든 사람 덕분에 시스템이 멈춰버린 것. 클라우드(Cloud)가 있었다면 큰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로드 밸런싱(Load Balancing)이나 부하 분산 같은 개념조차 없던 때였다.

화가 난 고객은 데이터 센터로 "다모여"를 외쳤다. 개발 PM인 나를 포함하여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베이스, 개발 담당자 모두 데이터 센터로 달려갔다. 고객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전까지는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듯 밤새 난상토론이 오갔다. 결국 갑을병정 라인에서 가장 끝 쪽에 있는 업체가 책임을 떠맡았다.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오후 파김치가 되어서야 데이터 센터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쉬지도 못하고 바로 회사에 보고하러 가야만 하는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

그 이후 공포의 "다모여"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휴가 일정을 잡았다가도 고객이 부르면 취소해야만 했다. 명절에 전을 뒤집다가도 회사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장애가 날까 봐 노심초사하느니 안정적이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커리어 고민을 시작했다.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

대학 졸업 후 쉴 새 없이 달려오던 나는 잠시 멈추고 나에게서 벗어나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언제 행복한가? 누가 가장 부러운가?'

좋아하고 잘하고 행복한 것은 모르겠지만 부러운 사람은 떠올랐다. 모토로라코리아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모토로라 유니버시티 소속의 차장이 회사 설립자 소개와 역사를 소개하던 모습이었다. 신규 입사자 교육 같은 건데 뭐가 그리 있어 보였는지. 그녀처럼 교육담당자(Human Resources Development, HRD)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연말 회사 조직개편에 인사팀 상무에게 찾아가 한 자리 달라고 맞짱을 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가 "다모여" 트라우마 덕분에 샘솟았다.

트라우마와 용기에 힘입어 아직 교육 일을 신나게 한다. 일과 비밀 연애를 시작했는데 동료들이 다 알아차려 공개 연애가 되고 말았다. 좋아서 일하는 게 느껴진다고들 말한다. 시키지 않아도 일을 벌이고 혼자 좋아라 한다. 평일 저녁에도 주말에도 기꺼이 일한다. 강의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 신나서 어떤 희생이라도 치른다. 일하는 만큼 보상 받지 못해도 헤벌쭉 웃는다. 

'만일 처음부터 문과로 지원해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교육담당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이 일을 지금처럼 사랑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느 날 CTO(Chief Technology Officer, 기술 임원)를 찾아가 개발하겠다고 생떼를 부릴지도.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다시 말해서, 앞을 보면서 점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고서야 점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점이 어떻게든 연결될 거라 믿어야 합니다. -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 축사 중에서

커리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점을 연결한다(connect the dots)'는 표현을 많이 언급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앞을 보면서는 점을 연결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앞을 바라보며 점을 그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돌아돌아 어찌어찌 연결되어 교육담당자가 되었다. 이 점이 미래의 기업교육에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야 있지만 여기까지 올 줄 어찌 알았겠나? 

커리어로 고민하는 자여, 북극성을 향해 일단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자.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연결이 될 터이니, 걱정일랑 내려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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