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도 많지만 저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려 해요. 독서와 글쓰기에 앞서 제 원초적인 취미는 학습입니다. 스스로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평생 학습하는 인간)라고 주장할 만큼 주말에도 특강을 수강하거나 스터디 모임에 참여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주로 오프라인에서 참여했다면, 요즘은 줌에 빠져 사는데요. 지난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4세션에 참여하느라 9시간 동안 줌을 사용했어요. 가상과 현실이 뒤바뀐 삶을 사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하나요?
요즘 도서관에서 유명 작가들을 초빙해서 무료 특강을 줌으로 제공하기에 이동 시간도 필요치 않으니 돈도 절약하고 시간도 절약하면서 풍성한 강의를 즐기고 있습니다. 정여울 작가님은 특강에서 90%를 우리처럼 독서와 학습에 투자하고 10%를 글쓰기에 사용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인풋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저 역시 독서와 학습의 바다에 풍덩 빠져 즐겁게 서핑 하고 있습니다.
"책의 기쁨과 슬픔 :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 박균호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공지를 보고 큰 기대 없이 신청했습니다. 마침 지난 토요일은 여유가 있었거든요. 수강하지 않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어요. 줌 강의를 처음 진행한다는 박균호 작가님의 인사말에 조금 불안했어요. 흔한 파워포인트도 공유하지 않고 자신의 서재에서 강의하더군요. '처음엔 디지털답지 않은 온라인 특강이구나'라고 조금 독특한 분이라 여겼죠. 그런데 정말 기우였습니다. 완전히 몰입하며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포스터를 다시 보니 "예전 사진이라 사진과 실물이 달라서 죄송하다"는 처음 멘트가 생각났어요. 너무 솔직한 입담에 웃음이 나왔어요. 《율리시스》가 전설적인 작품이 된 과정을 설명하셨는데요. 누리꾼들의 클레멘타인 영화 추천에 작가님이 당한 이야기와 곁들여서 설명하니 확 와닿았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작가가 일부러 17장에 마침표를 크게 만들었는데 파리똥인 줄 알고 무시되었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했어요.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의 '책 사냥꾼, 북케이스에 집착하다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부분을 설명하면서 "잠깐만요"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작가님은 그때부터 뒷배경으로 보이던 책장에 가서 책을 한 권씩 가져오며 직접 다 보여주셨는데요. 언박싱 같기도 하고 보물상자에서 보물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그 모습이 줌 속에서 구현되니 아이러니였죠. 가상으로 연결되었을 뿐 우리는 작가님의 서재에 놀러 갔습니다.
지오르지오 바자리의 책을 번역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은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 33명 현실의 삶을 당시에 세세하게 쓴 책이랍니다. 이근배 의과대학 교수가 원서를 구하지 못해 하버드대에서 복사본을 가져와서 18년 동안 공부하며 번역했다고 합니다. 책에 그림을 하나하나 오려 붙였는데요. 그걸 줌으로 보니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한길사에서 2002년 번역본에 해설을 더해 2018년부터 한 권씩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으로 2019년에 총 5권으로 완결했어요. 박균호 작가님은 책이 발간될 때마다 한 권씩 구매했다는데요. 총 5권이 되는 시점에 한길사는 세트로 구매하면 북케이스를 주는 이벤트를 했대요. 이걸 전문 용어로 '북케이스 뒤통수'라고 언급하시는 작가님의 말씀에 완전 공감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북케이스도 탐내죠. 결국 한길사에 연락해서 다행히 북케이스를 받았다며 "잠깐만요"와 함께 자랑스러운 북케이스를 보여줬어요.
1976년에 발간된 《뿌리깊은 나무》 잡지를 보여주며 우리말 사랑이 담긴 책이라고 알려줬어요. 그리고 "잠깐만요"와 함께 다른 책을 찾으러 갔습니다. 줌의 채팅방에 이런 문장이 올라왔어요.
"잠깐만요"라는 말이 이렇게 설렐 줄이야!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눈을 번쩍 뜨고 귀를 쫑긋하며 작가님이 무슨 책을 또 가져오시나 집중했어요. 정말 그 순간 심쿵했어요.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찐하게 랜선으로 전달되었죠. 작가님의 인생 책으로 꼽은 《숨어사는 외톨박이》는 《뿌리깊은 나무》 잡지에서 '숨어사는 외톨박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거라고 합니다. 내시, 무당, 고약장수, 땅꾼, 상궁, 풍수장이, 대장장이 등 전통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라는 데요. 작가님의 할아버지 이야기 같아서 좋아한다고 해요.
그러고 "잠깐만요"을 여러 번 외치셨는데요. 1985년 중2 때 국어 선생님이 소개해 준 잡지 《Human.10》을 펼쳐 담뱃갑 그림이 있는 내용도 보여주고, 신영복 작가님의 옥중사색 《엽서》도 소개했어요. 손글씨와 그림, 감옥의 검열 도장까지 있는 이 책은 처음에는 친구와 나눠 가지려 만들었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오면서 이 책이 더 예술적으로 인정받았다는데요. 이 모든 걸 다 가진 작가님은 진정한 부자 같아요.
생각지도 못한 눈 호강에 마음을 진정하던 중 맺음말은 결정타였는데요. 특수학교의 영어 선생님인 작가님은 영어에 몰입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교과서에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메모를 해서 책 내용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책과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죠. 문득 제 일을 사랑하기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어요. 당시 제 삶의 모든 것이 일과 연결되었는데 지금은 조금 느슨해진 기분이 들었어요. 책도 늘 절친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에게 있는지 고개가 숙어졌어요.
박균호 작가님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과 《오래된 새 책 :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에 소개한 내용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들을 읽고 싶더군요. 가끔 절판된 책 때문에 안타까운 경우가 있는데 절판된 책을 주제로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해보지도 못했어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공감할 내용이라 짐작됩니다. 읽고 싶은 책이 쌓여가서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이렇게 멋진 강의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요일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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