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제 장난감 중 하나는 엄마의 가계부였어요. 여성잡지를 사면 따라오는 부록으로 가계부가 유행이었죠. 엄마는 그 가계부에 일기도 쓰고, 일일 지출명세를 꼼꼼하게 기록했어요.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빠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네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집에 책이 별로 없던 저의 유일한 놀이는 엄마 가계부의 일기를 읽는 거였어요. 엄마의 삶을 글로 배웠어요.
부모님과 4형제가 단칸방에 살다가 제가 7살 때 방이 두 칸인 집으로 이사갔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방방 뛰며 이사한 기억이 나요. 당시는 신축건물이었지만 찬물만 나왔어요. 개인 방은 고사하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에 사는 게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위해 옷 한 벌 제대로 사주지 못했어요. 엄마 친구분 딸의 옷을 물려 입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죠.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을 물려받는 부끄러움보다 엄마에게 부잣집 친구가 있어 행복했어요. 지은 지 수십 년이 지난 그집에 아직도 부모님이 사십니다.
엄마는 전업으로 일을 하지 않으셨지만 살림에 보탬을 주려고 다양한 일을 하셨어요. 지금의 네트워크 회사에서 일했다면 다이아몬드 레벨이 될 만큼 사교성이 좋으셨어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에서 이웃에게 보세상품을 팔기도 했고, 엄마 고향의 명물인 쥐치포를 도매로 사다 소매로 판매하기도 했어요. 쥐치포가 상자째 집으로 오면 우리는 작은 비닐봉지에 나눠 담고 양초 불로 밀봉했어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포장했던 기억이 나요. 집안 가득 비린내가 진동했는데 마냥 신났어요. 쥐치포가 질릴 만도 한데 최애하는 맥주 안주였죠.
엄마는 N잡러의 선구자였어요. 늘 바쁘셔서 저녁 식사 전까지 집을 비우셨죠. 우리 아이들처럼 저 역시 어렸을 땐 엄마가 집에 없는 게 불만이었나 봐요. 중학교 때 이유 없이 성적이 떨어진 적이 있었죠. 담임 선생님이 저를 조용히 불러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요. 글쎄요? 왜 성적이 갑자기 떨어졌을까요?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겠죠? 그런데 전 부끄러웠는지 엄마 핑계를 댔어요. 집에 가면 엄마가 없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땐 엄마가 집에 없는 게 서글펐나 봐요. 그때가 사춘기였을까요? 잠시 울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빠듯한 가정 형편에 가계부 써가며 네 아이 건강하게 잘 길러내고, 직장에는 다니지 않았지만 다양한 부업으로 아빠만큼의 수익을 올린 엄마. 각종 지역 모임에서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자녀가 다 커서 사회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자녀가 각자 결혼하고 자신의 인생길을 찾아 나선 후 엄마는 부업을 하지 않으셨고 지역 모임만 간간이 취미생활로 참여하셨어요.
저의 롤 모델이 될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엄마가 이제는 아주 힘들어하세요. 세월이 야속하다고나 할까요. 나이 먹어야 철이 드는 게 맞나봅니다. 엄마가 좀 더 건강하실 때 해외여행도 함께 다녀오고, 우리 집에도 더 자주 놀러 오시고 오래 머물러야 했는데 말이죠. 좀처럼 후회를 하지 않는 편인데 엄마 한때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저는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주변 분들에게는 부모님 건강하실 때 더 많이 찾아뵙고 맛난 것도 대접해 드리고 함께 여행도 다니라고 말합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용돈 꽃바구니 만들기 이벤트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엔 생화로 꽃꽂이를 하는 줄 알고 기대했는데 말린 꽃을 스티로폼에 꽂는 거였어요. 그래도 완성하고 나니 근사한 꽃바구니가 되었네요. 용돈을 봉투에 넣어드리는 건데, 돈이 아무 소용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을 넣어드려야 할지 잠시 고민해 봅니다. 자주 찾아뵙고 얼굴 보여드리는 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마저도 잘 못 하는지라 반성해봅니다. 다음번에 부모님 댁에 갈 때는 이 꽃바구니를 가지고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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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7일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쓴 글: 엄마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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