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일인생활 / 81번째 스토리-기억의 퇴적물

사랑이 넘치던 순간도 아니고, 감정이 휘몰아치는 어떤 극적인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머릿속 이상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뜬금없이 떠 오르는 손끝 거스러미 같은.

2022.09.18 | 조회 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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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일인생활 스토리

일상을 주제로 개인적이고 사소한 짧은 글을 매주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보내 드립니다.


아주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벼운 두통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거나 조금은 꿈에서 덜 깬 기분이 드는데, 그대로 누워있다간 침대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아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옵니다. 아마도 수면 부족과 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면의 질 때문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냉장고의 시원한 물을 한 잔 들이켜고 식탁에 앉아 뿌연 안개 속 같은 멍한 느낌을 털어 내려 애쓰지만, 아침 내내 발목에 무거운 뭔가가 매달린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굉장히 안타까운 내용의 꿈을 꾸거나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니고 몸부림을 심하게 치는 버릇도 없기 때문에, 한 번씩 겪게 되는 이런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침의 공기는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잠이 덜 깼다고 하기에는 졸리거나 다시 눕고 싶거나 하진 않지만, 몽환적이라는 근사한 단어를 붙이기엔 이게 기분이 나쁜 것인지 혹은 좋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얼마 전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 기분에 대해 털어놓았더니, 친구는 잔에 남은 맥주를 비우면서 말했습니다.
"너, 외롭네"
차라리 '스트레스'라고 말했으면 바로 수긍했을 텐데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할 말을 잊었고, 친구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밥그릇 뺏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면서 연애 이야기가 나와 자연스럽게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화제가 전환되었고, 처음에는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로 시작했지만, 점점 '이런 점이 좋았다'로, 그러다 결국에는 '외롭다'로 종결되는 조금 슬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친구의 저 말을 다시 곰곰이 떠올려 보지만, 제 머릿속이 멍한 이유는 아무래도 외로움보다는 수면 부족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고, 외롭다는 말은 제가 그 단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알고 저의 연애 이야기가 재미있고 궁금한 친구가 그저 툭 던진 한마디일 뿐일 겁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떤 이별을 겪고 나면 가장 무서운 것이 남겨진 습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잘 잤냐고 문자를 보내던 습관, 자기 전에 잘 자라고 전화하던 습관, 헤어짐이 아쉬워 잡고 있던 손을 놓을 때 한번 꼭 쥐고 놓는 습관. 이런 것들이 참 오랫동안 손끝과 머릿속에 남아 한참을 괴롭힙니다. 그것들이 채워져 있다 텅 비게 된 시간을 마주하게 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고 그 당황스러운 감정은 크나큰 상실감으로 떠오르며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힘든 시간을 어찌어찌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것들을 언제 잊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하얗게 되는 때가 오게 되고 그제야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보다 더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오랫동안 잊기 힘든 습관이 아니라 스스로도 '왜 이게 기억나지?' 싶은 에피소드입니다. 사랑이 넘치던 순간도 아니고, 감정이 휘몰아치는 어떤 극적인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머릿속 이상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뜬금없이 떠 오르는 손끝 거스러미 같은.

예전에 집에 놀러 오면 가끔 요리해 주던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독특한 요리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죠. 독특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혹은 일반적인 레서피와는 다른 방식과 다른 재료를 쓰는데도 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좋은 기억 보다 나쁜 기억을 더 많이 남긴 사람이었고 여러 상처를 남긴 사람이었지만, 그 여자친구 덕분에 생일날에도 밀어내던 미역국을 먹기 시작했고, 편식으로 밀어내던 몇몇 요리들을 먹게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콩나물국밥을 좋아하는 것을 안 뒤로는 가끔 콩나물국을 만들어 줄 때도 있었죠.

꽤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됩니다.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온 여자친구가 차가운 콩나물국을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냉국이 아닌가 싶은 정도로 맑은국에 청양고추와 파를 올려서 보기에도 시원해 보였습니다. 식탁에 앉자마자 여자친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국물 한번 먹어 봐."
자신에 찬 그 목소리와 말투.

숟가락을 들어 콩나물국의 국물을 한 입 먹었는데 그 맛은 사실,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차가운 콩나물국에서 쉽게 느껴지는 콩나물의 비린 맛이나 멸치 육수의 비린 냄새와 맛은 전혀 없었고, 멸치 육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맑았지만 분명 육수 맛이 났고, 미원이나 다시마의 들큼한 맛도 전혀 나지 않았던, 그동안 먹었던 콩나물국 중에서 가장 맛있는 콩나물국이었습니다.
이거 너무 맛있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어떻게 만들었는지 말 안 해 줄 거야. 말해주면 넌 분명 나랑 헤어지고 나서 다른 여자에게 만들어 줄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여자친구와 3년을 더 만났지만 결국 콩나물국의 비법은 알 수 없었습니다. 저 대답을 들은 이상, 두 번 다시 그 질문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럴 리 없다며 다시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분명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고 여자친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후로 십 년도 지난 시간이 지났지만, 콩나물국을 끓일 때마다 저 때의 대화가 생각났는데 콩나물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요리를 할 때도 생각 나 혼자 헛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습니다. 콩나물을 국을 끓일 때마다 그때의 맛을 떠 올려 보지만 십 년도 넘은 맛의 기억을 완벽하게 떠올리면서 재현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 이제는 포기하고 그냥 제 식으로 만듭니다.

일본에서 파는 콩나물은 한국의 콩나물보다는 작고 여린 편이고 양손 겨우 찰 정도의 양을 한 봉지로 팝니다. 이 소박한 양의 콩나물 한 봉지를 흐르는 물에 씻어 냄비에 넣고 콩나물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끓입니다. 끓기 시작하면 불을 약하게 한 뒤 뚜껑을 닫아 30분 정도를 뭉근히 끓이고 그동안 밥을 하거나 다른 찬 준비를 합니다. 국 냄비의 불을 끄고 뚜껑을 열어보면 처음 부은 물이 2/3 정도로 줄어 있습니다. 삶은 콩나물의 절반을 덜어 물기를 뺀 다음 무침을 만들고 나머지는 국으로 준비하는데 멸치 육수 없이 콩나물로만 끓여낸 국에 소금 간만 하고 파와 고추를 올려서 먹습니다. 깔끔하고 꽤 심심한 맛인데 해장용으로도, 구운 연어를 밥 위에 올려 오차즈케용으로도 먹기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후에는 오히려 그 여자친구에게 요리해 줄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요리를 많이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도 있지만, 그만큼 추억거리가 덜 만들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아쉽고 미안하지만 다행이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감정.

아침에 가끔 느껴지는 멍한 느낌이 외로움이라고 말한 친구에게서, 외로움 어쩌구 한 것은 제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떠 오른 단어를 뱉은 것뿐이고 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을 가 보는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저는 오히려 그게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는 이상한 납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애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만들어지고 쌓여온 습관처럼 해 온 여러 행동이 무의식 속에 마치 퇴적물처럼 지층을 이루고 쌓여있다 어느 날 갑자기 온 지진으로 불쑥 튀어나오지만, 그 감정의 대상이 없어 허망해진 상태가 그 '멍한 기분'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거죠.

오늘 아침에 문득 떠 오른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때였습니다.
얼굴을 볼 수 없어 표정에 드러난 감정을 알 수는 없지만, 목덜미와 어깨로 이어지는 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보일 때는 참 묘한 기분이 들게 됩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나만 알고 있는 느낌. 긴장할 때의 모습, 웃을 때의 모습, 울 때의 모습, 멍하게 있을 때의 모습들이 곡선에서 다 보이는데 저는 그것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람과 조금 떨어져 걸으면서 그동안 의식하지 않았던 뒷모습을 유심히 본 날. 늘 앞에서만 봐 오던, 뒷덜미를 쓰다듬는 버릇을 뒤에서 처음 봤습니다. 쓸리는 머리카락의 방향과 실반지가 반짝이던 손가락의 빠른 움직임. 천천히 다시 머리를 정돈하고.
"뒷모습? 어때? 웃겨? 걸음걸이 이상해?"
안 웃겨. 걸음걸이 괜찮아. 예뻐.
평생 어깨를 넘기는 길이로 기르던 머리를 자른 게 약 3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었고 그냥 잘랐다고.
"그때 생긴 거 같아. 머리 만지는 버릇. 처음엔 뒷머리를 바싹 자른 게 너무 적응이 안 돼서 애먹었지만."

변화가 버릇을 만들고, 그 버릇이 누군가의 기억을 만드는 과정들.
저의 버릇은 누가 기억해 줄까, 남아있다면 어떤 버릇이 남아있을까. 이런 생각이 길어질수록 아쉬운 마음도 점점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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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동안 혹은 한 주 동안 제가 즐겨 들었던 곡들을 모은 플레이리스트입니다.
글을 쓰면서 떠 오른 일들에 엮인 곡들도 있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새롭게 발매 된 신보도 있습니다. 아래 링크된 애플뮤직과 스포티파이, 유튜브를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APPLE MUSIC  /  SPOTIFY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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