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용 선생의 《인연》

서울외계인 뉴스레터 188호

2021.10.14 | 조회 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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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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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의지했던 책들이 있어. 고등학교 3학년 때 국문학과를 가기로 결정하고는 정지용 시인의 시집을, 대학 때는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182호)를 가방에 넣고 다녔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딱히 그럴만한 책이 없었어.

그러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선생님께서 김구용 선생을 알려주셨는데, ‘김구용 문학전집’ 중 산문집 《인연》을 사서 고작 몇 편 읽고 나서는 그 책이 참 귀하게 느껴지더라(구매기록을 보니 2009년에 샀네). 지금도 한국인 중에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 하면 김구용 선생이 떠올라. 최근 며칠 동안 책장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다시 손에 쥐게 된 게 큰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 어찌 보면 그동안 넋을 놓고 살았다는 얘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좋은 글들이 너무 많지만 오늘은 예전에 표시해 둔 몇 구절을 옮겨 볼게.

독서는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다. 독서도 생활의 하나라면 그만이지만 역시 습관인 만큼 일종의 중독이다. 그래서 나는 아는 사람과 만나면 “요즘 무슨 책을 읽는가”, “특히 기억에 남는 글은 뭣이냐” 하고 묻긴 해도 “책을 읽으라” 권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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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년 시절에는 삽화만 보고서 책을 샀다. 그 다음은 광고나 후기만 보고서 샀다. 다음은 유명한 사람이 쓴 것이면 무조건 샀다. 이젠 책을 사는 데도 겁이 많아졌다. 슬며시 정가부터 본다. 전과 몇 범의 도적처럼 문패나 대문은 보지도 않고 우선 책 속으로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한다. 이때 눈은 불신하려는 냉정으로 가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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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이성異性이나 돈처럼 독서도 자칫 잘못하면 위험하다. 자기도 모르는 중에 독서로 권태를 잊는 습성을 기르다가 식상하거나 중독되면 곤란하다. … 독서는 생을 위한 비료 정도로 생각할 일이다. 영양 섭취 정도로 생각할 일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바로 비료나 영양 섭취가 된다고 할지라도 어떤 기쁨이 있어야만 인간이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의의를 느끼지 못할 때에는 무리해서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 공부와 독서가 어찌 인생의 전부이겠는가. 남산의 크기에 비한다면 한 알의 영신환 정도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독서 유감'(1964) 중

바깥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방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낙이다. 남들은 몰취미한 일이라 할지 모르나 나는 약간 고독해야 안정하고 약간 근심이 있어야 보람을 느낀다. 어쩌다가 내게는 자진하는 적극성이 없는지 알듯 모를 듯하나 어디나 고독과 근심이 있는 세상은 참 묘하기만 하다. 이해 관계로 사람을 대하는 일은 고통이어서, 놀러 오는 친구는 반가이 맞이하되, 남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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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수집이란 말은 버리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아는 분들이 보내주는 편지를 버리지 않았더니 저절로 수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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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할 일은 못 되나 필적 수집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도한 욕심만 삼가고 뜻만 있으면 기회는 있게 마련이다. 옛 것과 드문 것만이 귀중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것도 구해두면 먼 훗날에 자연 귀한 것이 되어 전해질 것이다. 잘 썼건 못 썼건 간에 글을 지어 쓴다는 일은 매우 진지한 자취이다. 그 진지한 흔적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더 귀중하다고 요약할 수 있지 않는가.

'필적 수집'(1970) 중

요즘 세말에 나오는 일기책은 종류도 다양하고 가지가지 특색이 있더군요. 언젠가 보니 열쇠가 붙어 있어 잠그도록 만든 일기책도 있었습니다. 남이 읽을 수 없도록 지켜준다는 뜻이겠지요.
나는 그런 일기책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이 읽어서는 안 될 일기라면 쓸 필요조차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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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많습니다. 일기도 문학의 일종이라면 사실만은 그대로 기록해서는 가치가 없습니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만의 큰 사건은 아닙니다. 말이란 묘한 것이어서 같은 뜻일지라도 표현에 따라 얼마든지 품격 있게 더 절실하게 전달된다는 경우를, 우리는 평소의 독서에서 많이 느껴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남이 보아서는 안 될 일기를 쓰느니보다는 사실보다도 더 감명을 줄 수 있는 표현을 닦아야 합니다. 

'일기는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1978) 중

앞으로는 손이 닿는 곳에 꽂아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마다 꺼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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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이란먼산

    0
    10 months 전

    아! 잘 보았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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